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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신분제와 관등제_하일식 ≪제3판 한국사연구입문≫

관등이라는 용어는 동시대 중국이나 일본의 비슷한 제도와 구분하면서 고려조선과의 차이를 염두에 둔다면 적절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3세기 무렵(삼국지위서 동이전) 고구려 관제는 다원적이었다. 4세기 이후 일원화 과정을 밟았고, 그 수도 늘어났다. 계 관등과 사자使者계 관등 두 계통으로 크게 나뉜다. 앞의 것은 기존의 제가 세력에, 뒤의 것은 국왕에 직속하여 왕권을 뒷받침한 직책에 연원을 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면서 사자계 관등이 형계 관등보다 중시된 듯한 시기가 있었는가 하면, 말기에는 양자가 교차되면서 서열화한 모습을 띠고 있어서 국왕 권력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지만 귀족을 압도하지 못하고 귀족연립정권의 상태에 머물렀던 결과로 이해하고 있다. 관등제가 일원화한 뒤에도 시대별로 관등 구성에 변동을 겪었다는 것, 그리고 관등의 수도 1214등으로 일정치 않다는 것 등이 고구려 관등제의 특징이다. 이는 국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지배체제가 확립되고 율령이 반포되어 제도와 관행의 법제화가 이루어진 뒤에도, 관등제 만큼은 탄력적으로 운영되었을 가능성마저 시사한다.

백제의 경우 고구려의 대가와 마찬가지로, 국가 형성 초기에 주변 유력 세력을 편제하면서 이 붙은 관등이 마련되었을 것이며, 이들이 주도하는 귀족회의체(諸率會議)가 있었으리라 짐작한다. 삼국사기260(고이왕 27)16관등제와 공복제公服制가 정해졌다고 하지만, 사비로 천도한 6세기 전반의 사실을 소급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비시대에 확립된 16관등제는 의관제衣冠制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6세기 말 무렵 6좌평제가 시행되어 좌평의 수가 늘었는데, 유력 귀족 가문들을 중심으로 정치 운영이 이루어진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이해한다. 말기의 상좌평대좌평이라는 특설직이 보이는데, 관등인지 관직인지를 엄밀히 판단하기는 어렵다.

고구려와 백제의 경우에도 관료제 운영에 관등이 중요한 기준이었고, 또 관등이 신분제의 규정을 받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만, 신라처럼 신분에 따라 승진의 상한이 존재했는지를 뚜렷이 확인하기는 어렵다.

신라 관등제가 삼국사기에서는 32(유리왕 9)17관등제가 마련된 것으로 되어 있지만 후대의 소급이며, 법제상으로 확립된 것은 520(법흥왕 7)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독립성이 강한 여러 세력들이 모여서 사로국을 이루었던 만큼, 초기에 다원적이었던 관제가 일원화하는 과정을 거쳐 17관등제가 성립한 것으로 이해된다. 마립간 시기를 거치면서 다원적인 관제는 일원화 과정을 밟았고, 이후 6세기에 들어 17등 경위제로 정착하였다. ‘자가 붙은 경위는 그 과정에서 분화된 것들이다(대아찬대나마). 외위제는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찾을 수 없는 신라만의 독특한 제도로 그 대상은 정복복속된 지방의 유력자 가운데 왕경으로 이주하지 않고 현지에 남은 자들을 위하여 베푼 것이었다. 6세기 말 이후 지방민에게도 경위가 주어지면서 외위는 사라졌다. 하지만, 지방인은 여전히 관칙 진출에 제약이 있었고, 따라서 관료제 운영에서 왕경인과 지방인의 상호침투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으리라 짐작하고 있다. 이렇게 관등에 신분적 규제가 가해지고 있었던 만큼, 특정 관직에 임명될 수 있는 자격도 신분에 따라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중앙 관부의 관직을 맡을 수 있는 자격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었다. 지방에 파견되는 도독이나 태수 등도 취임 가능한 관등 범위가 정해져 있었던 만큼 신분의 제약을 받았다. 한편, 중위제重位制는 신분 제약에 융통성을 더하려는 목적에서 나왔다는 시각, 중위의 설정은 7세기 중반을 전후한 시기에 이루어졌으리라는 시각에 대해서는 학계의 판단이 대체로 일치한다. 그러나 대나마나마 어느 한 쪽의 중위는 부정되기도 하고, 나마 중위를 밭을 수 있는 신분을 추정하는 데도 여러 의견이 나뉘고 있다. 이렇게 관등이나 관직과는 별개로, 타고난 신분을 기초로 국정을 운영하는 최고 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자들이 대등大等이었다. 다만 귀족회의의 구성 원칙이 신라 말기까지 변함없이 지켜졌을까 하는 점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이 있다. 834(흥덕왕 9)에 재정비된 신분규정에 따르면, 진골6두품4두품이 있었고, 그 아래는 백성으로 간주되었는데, 자잘한 규제에서는 4두품과 백성이 종종 동일시되기도 했다. 따라서 9세기 전반의 골품제는 하위 신분층부터 실질적인 구분이 옅어지면서 변질되는 과정을 거쳐 해체되고 있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만큼 완고한 폐쇄성은 없었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고구려와 백제의 천도 사실을 통해 혈연적인 유대가 특정 지역에 고착되는 것이 어느 정도 완화되었으리라는 추정도 있다. 그러나 여러 번의 천도와 폐쇄적인 신분제의 존속 여부는, 두 가지 가운데 어떤 것이 원인이고 결과인지 등에 대해서 아직 깊이 검토된 적이 없다.

한편, 삼국이 피지배층까지도 포괄하는 신분제가 성립해 있었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현재의 연구 수준에서는 양천제의 성립을 삼국시대로까지 소급하기에는 무리가 있고, 남북국시대 이후에도 좀 더 적극적인 검토를 해야 할 상황이라 생각한다. 삼국에 국한하여 이야기한다면, 천민신분으로 노비의 존재는 확인된다. 그러나 후대의 양인에 해당하는 부류와 천민 사이에도 봉평비에 보이는 노인奴人과 같은 존재가 확인될 뿐 아니라, 양인으로 분류될 대상도 다양한 경우가 있다.

관등제의 기원과 성립은 고구려의 경우를 모델로 삼아 신라백제로 일반화하는 경향이 있었고, 관료제의 운영과 신분제와의 관련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사료가 많은 신라를 기준 삼아 고구려백제로 확대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한편, 기존의 신분제 연구가 신라의 골품제에 주된 관심을 기울인 나머지 계급관계 또는 계층구조(하호-호민-)가 신분제를 지탱하는 궁극적인 바탕이 된다는 점을 소홀히 했다는 것이다. 읍락사회가 해체된 결과로 기존의 계층구조가 어떤 식으로 재편되는지, 또 그 결과가 왜 반드시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의 성립으로 기결되어야 하는지, 삼국의 집권체제가 반드시 비슷한 형태여야 하는지 등에 대한 역동적인 이해에 도달하기에는 미흡한 측면이 많이 남아 있다.

 

하일식 2008 <신분제와 관등제> ≪새로운 한국사 길잡이 : 3판 한국사연구입문(한국사연구회 엮음), 지식산업사, 96110.

 

△ ≪새로운 한국

사 길잡이 상표지(다음책http://book.daum.net/에서 얻음)

 

# 관등제 부분은 앞의 <고대의 정치체제>와 겹치는 내용이다. 고구려와 신라의 관등제가 모두 다원적이었다면, 백제 또한 그러한 과정을 겪지 않았을까. ‘관료제 운영과 신분 규제’, ‘골품제와 양천제는 거의 신라 사례가 중심이 되고 있다. 사료의 과다를 떠나서 연구의 편향성이 엿보이는데, 연구의 시각을 달리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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