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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정치체제_주보돈 ≪제3판 한국사연구입문≫

고대국가가 중앙집권화의 수준이나 지배체제의 정비와 정치운영 면에서 왕권과 귀족(/관료) 사이의 관계 등에 따라 한결같지 않다.

부체제는 초기국가가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로 나아가는 데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수 과정인 듯이 설정되었다. 고조선과 부여가 도달한 정치체제의 수준도 이 부체제 수준으로 짐작하고 있다.[초기국가(부체제) 중앙집권적 귀족국가] 각 부마다 비록 초보적인 형태이기는 하였으나 독자적인 관등官等/관직 체계를 갖추었고 일정 정도의 군사력도 보유하였으며, ‘부장部長은 자신들만의 조상을 섬기기 위한 제사체계도 있었다. 각 부는 지방에 대한 일정 정도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국가 중대사는 부장/그에 버금가는 유력자가 참여하는 회의체에서 결정되었다. 당시 국왕은 어디까지나 회의체를 주재하였지 결정권자는 아니었다. 고구려의 부와 신라의 부를 비교할 때 규모와 인구의 차이가 드러남에 따라 운영 방식 자체도 상당히 달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백제의 경우는 고구려의 유형에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부는 국왕을 정점으로 한 집권화가 한층 진전되면서 저절로 독자성을 상실하여 갔다. 부체제의 관등 조직은 경위京位로 말끔히 정리되었다. 부체제와 구별하여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라 일컫고 있다. 이 시점은 고구려가 4세기초, 백제는 4세기 중반, 신라는 6세기 초반 무렵의 일로 추정하고 있다. 율령律令이 수용되면서 국왕은 초월적 지위로 부상하고, 왕호를 대왕大王으로 바꾸었다. 부체제의 회의체의 주재자 자리는 귀족들에게 넘겨졌다. 이제 회의의 참여 자격이 달라지고 기능 자체도 크게 약화되는 등 근본적인 변화가 뒤따랐다.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이 곧장 그대로 집행되지 못하고 국왕의 재가를 받아야만 했다.

관부와 관직 조직과 관련하여 고구려의 경우 고유한 전통성을 강하게 지닌 운용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백제는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아 6세기에 이르러 국가 행정을 담당하는 외관 10부와 왕실 사무를 담당하는 내관 12부 도합 22부사제部司制로 정리되었고, 외형적으로는 상당히 잘 짜인 체계를 갖추었다. 신라의 경우 전통적인 요소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고구려나 백제를 매개로 받아들인 중국적인 요소를 적절하게 배합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백제의 정치운영이 왕실을 중심으로 한 귀족적 성격이 강하였다면, 신라는 관료적 성격을 강하게 지향한 차이점을 반영한 듯하다.

중앙집권화의 추진으로 군사에 대한 지휘권은 전적으로 국왕에게 직속되었고, 각 부가 보유한 병력도 국왕에 귀속되는 등 일원적인 조직체계를 갖추었다. 중앙군은 기존의 부병을 뒤이은 것으로서 거의 왕경인으로 구성한 핵심적 정예병이었고, 중앙군의 기본 병력은 의무병이었다. 지방군은 각 행정단위별로 편성되었으며 왕경에서 파견된 지방관이 그 지휘관을 겸임하였다. 삼국 사이의 항쟁이 치열해지면서 군정권軍政權과 군령권軍令權이 분화했다. 병종도 기본적으로 보병과 기병으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무기 체계가 발달하여 다양한 형태의 특수병기를 전담하는 보조 병력도 함께 두었다.

중앙집권화의 진전으로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의 수는 더욱 늘어났고, 그로 말미암아 지방의 유력자들은 간신히 유지하던 반독자적인 기반마저 거의 상실하게 되어 말단에서 지방관을 보조하는 지위로 전락하였다. 지방행정단위도 3단계로 나뉘었다. 고구려의 부, 백제의 방, 신라의 주는 가장 상위의 지방행정단위였는데, 모두 군관구軍管區로 기능하였다. 이 지방의 기초 단위로 기능하였다. 그리고 그 중간 행정단위로 군이 자리하면서 명실상부한 군현제가 성립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지방의 공동체적 성격을 탈각시킴으로써 재지 세력의 간여와 기능을 최소화하는 대신 국가 권력이 촌락 깊숙한 데까지 침투되도록 하였다.

이 시기 국가체를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라고 부르는 까닭은 항시 왕권에 저항하는 전통적인 귀족들의 견제가 뒤따른 탓이었다. 왕권 중심의 국정 운영을 지향하려는 세력과 다수인 귀족 중심의 운영을 지향하는 두 개의 큰 세력이 대립 갈등하는 형세였다. 그러나 지배체제가 점점 갖추어 지면서 마침내는 전자의 승리로 귀결되고 왕권의 초월적인 위상이 명실상부하게 정립되기에 이르렀는데, 이 단계를 일반적으로 전제왕권의 시대라 부르고 있고, 이 시기를 고대국가의 지배체제가 가장 정점에 이른 때로 풀이하기도 한다.

신라 중대에는 자연히 귀족보다는 왕자 등 근친 왕족을 핵심 요직에 채용하여 그들 중심의 정치 운영을 기도하였다. 기본적으로 골품제의 제약을 받기는 하였으나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관료조직체계 덕분이라 하겠다. 국학國學(고구려의 경당과 신라의 화랑도를 포함) 설치를 통한 새로운 인재양성 제도의 확립을 통해 관료제적 운영을 뒷받침하였다. 전제왕권을 유지해 간 지배이데올로기는 바로 유교였다고 하겠다. 전제왕권이 추구한 것도 바로 유교적 이상국가의 실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전제왕권의 하부에서는 이미 중세기적 질서가 싹틀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고 있었다.

 

주보돈 2008 <정치체제> ≪새로운 한국사 길잡이 : 3판 한국사연구입문(한국사연구회 엮음), 지식산업사, 8295.

 

△ ≪새로운 한국사 길잡이 상표지(다음책http://book.daum.net/에서 얻음)

 

# 전정田丁과 호구戶口의 다소라는 비교적 합리적인 기준으로 지방행정의 정비를 시도하였다(92)는 주장에는 선뜻 동의하기가 힘들다. “전제왕권의 시대와 관련해서도 개념의 여부를 떠나 신라사 중심으로 이해하려는 태도(923)에도 불만이다. 분명 당시 발해도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동시대 발해사와의 비교가 마땅히 필요하다. 그럼에도 발해는 독립항목으로 정리하고 있는데, 이 책의 한계이자 현 단계 역사학계의 한계라 하겠다. 아울러 전제왕권의 이데올로기로 유교를 지목한 주장도 문득 동의하기가 힘들다. 당시 불교의 성세가 그를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문자자료의 발굴로 기존 문헌 사료를 통해 통설로 굳어진 사실들이 재검토되기도 하고 또 전혀 알려지지 않은 내용들이 밝혀지면서 새롭게 정리될 필요성이 제기된다는 지적(94)에 힘을 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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