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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한국역사에서 국가의 형성_여호규 ≪제3판 한국사연구입문≫

국가는 합법적으로 권력을 행사하기 위한 군대(경찰), 법률, 감옥 등의 물리적 기구와 함께 조세를 징수하고 행정을 집행하는 관료조직과 지배이념을 갖추고 일정한 공간 범위에서 지속적으로 지배-피지배 관계를 이루며 정치권력을 행사한다. 고대국가의 형성은 인류가 국가를 단위로 역사를 전개한 시발점으로써 현재 역사의 본질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국의 고대국가 형성에 관한 연구는 1930년대부터 시작하였다. 백남운의 원시부족국가론은 원시사회 이후 과도기 상태의 국가체로, 부계씨족제가 가부장적 세대공동체로 전환된 시기, 곧 씨족사회의 모습과 계급관계가 공존하던 단계의 과도기 국가체를 뜻한다. 계급분열과 종족의 지역적 발전에 따라 정복국가로 전환되고, 포로노예의 급증으로 마침내 노예제국가가 완성됐다고 파악했다(3세기 이후). 당시 수용된 사적유물론에 충실히 따른다면 이 개념을 설정할 수 없다. 이에 많은 사회경제사가들이 원시부족국가라는 개념을 비판하면서 씨족제가 완전히 해체된 단계에 국가가 성립했다고 보거나, 공동체적 관계를 강조해 공동체 기관이 곧바로 지배기관으로 전환되면서 국가가 발생했다고 보았다.

손진태의 원시부족국가론은 원시공산사회가 부족국가를 거쳐 귀족국가로 이행한다고 보고, 부족국가 단계를 부족사회부족국가부족연맹왕국등으로 세분했다. 특히 국가형성 과정을 국가체의 외연적 확대에 초점을 두고 체계화했는데, 국가란 각 부족 단체가 외적 압력에 대항하여 단결을 도모하고 권력을 집중하는 과정에서 형성됐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부족국가를 거쳐 완성된 국가체는 사회구성체적 개념이 아니라 권력을 행사하는 지배계급 중심의 귀족구가로 개념화하였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북한학계는 청동기시대를 설정해 고조선 연구를 바탕으로 국가형성을 삼국 이전으로 소급했다. 또한 고조선(부여, 진국)을 노예제, 삼국을 봉건제 사회로 파악해 삼국의 성립을 국가형성의 반복이 아니라 노예제에서 봉건제 국가로의 전환이라고 이해했다. 다만 각 지역국가별 편차를 고려하지 않아 국가형성의 다양한 양상을 설명하지 못했다. 특히 최근에는 기원전 1000년기 후반기에 거의 모든 지역에서 원시사회가 해체되었다고 봄으로써 삼국 초기까지 확인되는 공동체적 요소와 삼국의 국가형성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한편, 195060년대 남한학계에서는 부족국가부족연맹체를 거쳐 고대국가가 성립한다고 이해했다. 이때 청동기와 철기의 생산력 차이에 주목함으로써 원시공동체 해체과정을 세분하고, 고조선과 삼국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도 했다. 그렇지만 철기 보급 이후 씨족공동체가 가부장가족으로 분화한다고 보면서도 씨족공동체적 관계가 온존한다고 파악해 계급관계에서 질적 변화가 상정되지 않았다. 부족국가라는 과도기국가를 설정하고, 완성된 고대국가도 계급관계에 바탕을 둔 권력기구가 아니라 가부장가족이 외연적으로 확대결합된 사회기구로 파악하였다.

성읍국가론城邑國家論은 서양의 도시국가나 중국의 읍제국가邑制國家를 모형으로 삼았다. 청동기시대에 토성을 중심으로 일정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한 국가라고 정의하여 지연적 요소에 주목했지만, 족장의 권위를 설명하여 부족국가론과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국가의 내부구조와 사회상을 거의 분석하지 않아 성읍국가와 그 다음 단계에 설정한 연맹왕국귀족국가 등 각 국가체의 성격과 연관관계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취프덤론Chiefdom은 신진화론자인 서비스의 ‘bandtribechiefdomstate’라는 사회진화가설을 수용한 학자들이 전개한 이론이다. 취프덤이라는 용어가 추장사회, 군장사회, 군장국가 등 다양하게 번역되고, 적용시기도 청동기에서 삼한까지 광범위했다. 신진화론이 내적 변화에 중시한 데 반해, 이를 수용한 학자들은 주로 인구, 무역, 재분배체계, 지배자 등 정치체의 외형적 측면을 강조했다. 또한 신진화론의 다선多線 진화와 특수진화 개념을 무시한 채 단선적 진화경로만 설정했다.

부체제론部體制論은 부족국가론은 비판적으로 계승하였다. 혈연성을 내포한 부족이라는 개념 대신 지역적 단위정치체인 부를 삼국 건국 주체로 설정하고, 이러한 부의 통합에 따라 삼국이 형성되었다고 보았다. 다만 국가 성립 초기에는 중앙권력이 각 부의 대외운동력을 통제했지만 각 부도 자치권을 보유했기 때문에 양자가 함께 국가를 운영했다고 이해했다. 곧 부를 중심으로 운영된 정치체제였다. 개념의 모호함이나 성립과 해체 요인을 정확히 밝히지는 못했지만, 삼국 초기 정치체를 고대국가로 파악해 그 운영양상을 규명했다. 그래서 1990년대 이후 삼국 초기 정치체제의 운영과 성격을 둘러싼 논의가 활발히 전개되었다.

초기국가初期國家론은 중앙집권체제 확립 이전 단계에 단순한 연맹체와 명확히 구별되는 국가체로, 그 성립 획기와 성격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 정의는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문헌사료와 고고학자료에 대한 종합적인 해석을 통해 개념과 형성, 그리고 획기의 공통분모를 찾아야만 한다.

만주와 한반도 일대 대략 기원전 1510세기 무렵부터 청동기시개로 전환하여 본격적인 농경사회로 진입했다는 연구에 따라 청동기문화를 바탕으로 형성된 한국 최초 고대국가인 고조선에 대해 북한 학계는 계급관계의 진전과 연관시켜 고조선의 국가형성을 상당히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 모계씨족사회부계씨족사회농경공동체의 변화 속에서 사적소유와 불평등관계가 더욱 발전하여 원시공동체관계가 붕괴되고 세대공동체도 단혼소가족으로 분열되었다고 한다. 경제력은 족장들에게 집중되었고, 정복전쟁이 활발히 일어나 지배예속관계가 형성되었다. 각 지역별로 소국이 형성되었으며, 마침내 기원전 87세기 무렵 노예소유자국가인 고조선이 성립하였다고 보았다. 계급관계가 심화되고 우세집단이 등장했다고 하여 이를 곧바로 국가형성으로 연결시킬 수 있을지는 의문이 든다. 순장묘로 추정하는 강상누상무덤은 가족공동묘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한다. 중국측 사서에 등장하는 조선이라는 명칭이 기원전 75세기 무렵 고조선사회가 형성되고 계급관계도 상당히 심화되었지만, 이때 국가가 형성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파악한다. 남한학계는 대체로 기원전 4세기에 고조선이 국가로 성립했다고 하면서도 강력한 집권체제를 갖추지는 못하고, 중앙권력이 요동서북한 일대의 여러 정치체를 아우른 연맹체로 이해하고 있다. 이어 기원전 2세기 위만조선 단계에 비로소 주변 세력을 대거 복속하여 국왕을 정점으로 전지역을 포괄하는 국가체제를 확립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부여가 자리했던 송화강松花江 유역은 청동기시기 서단산문화 중심지로 기원전 32세기 연과 한의 철기문화가 잇따라 확산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기원전 21세기 북류 송화강 중하류 일대를 포괄하는 국가를 형성했다. 다만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지는 못했는데, 제가諸加들이 사출도四出道를 주관했다는 기사는 이를 잘 보여준다. 4세기 전반 사실상 멸망할 때까지도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지 못하고 초기국가 단계에 머물렀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고구려의 국가형성에서 정복적 요소를 강조하거나, 초기부터 중앙집권체제가 확립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기원전 32세기 철기문화의 보급과 더불어 성장한 나집단那集團을 모태로 전개하였고, 기원전 2세기 후반 고조선의 외압에 대응해 연맹을 결성하였다가, 기원전 1세기 전반 현도군을 축출하며 나국那國으로 성장해 나국연맹을 형성했다. 이 무렵 부여에서 남하한 주몽집단이 토착집단과 결합해 세력을 확장하면서 서기 1세기에 각 정치체의 대외교섭권을 통제하며 나부那部로 편제해 이 지역 전체를 통괄했다. 이러한 나부체제는 3세기 후반 이후 전반적인 사회변화 속에서 중앙집권체제로 전환하였다.

백제와 신라로 성장하는 과정은 대체로 삼한 소국, 대국大國이나 소국연맹, 삼국 초기의 백제와 신라 등 세 단계로 파악한다. 이 가운데 어느 단계부터 국가로 볼 것인지는 견해차가 심하다. 삼한 소국의 형성 배경에 대해서는 종래 기원전 33세기 세형동검문화와 고조선 준왕의 남하를 주목하고, 진국(辰國, 衆國)을 그 전신으로 파악했다. 그렇지만 세형동검문화는 지역별 편차가 심하고, 준왕의 남하도 서해안 일대에만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이때 삼한 소국이 모두 형성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최근에는 기원전 1세기 철기문화의 확산과 더불어 전면적으로 소국이 등장했다고 이해한다. 삼한 소국은 국읍國邑 주수가 여러 읍락을 통제하던 정치체였지만, 여러 취락으로 구성된 각 읍락을 완전히 제압하지는 못했다. 도한 국가에 걸맞는 제도적 장치도 명확히 파악되지 않는다. 이에 대체로 삼한 소국을 국가 이전 단계의 정치체로 파악한다. 그런데 서기 2세기 중후반 삼한은 한군현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강성해졌다고 한다. 목관묘가 대형 목곽묘로 전환되고, 철제무기의 부장이 급증하며, 마을 유적의 화재 비율도 노게 나타나 각 소국의 갈등과 다툼이 치열했음을 알려준다. 이어 여러 소국을 아우른 대국(大國, 지역 )이 형성되었고, 이를 초기국가로 파악하기도 한다. 3세기에 삼한의 국이 대국과 소국으로 대별되었다. 다만 이러한 대국이 주변 소국을 완전히 통합했는지 나아가 국가의 제도적 장치를 갖추었는지는 더욱 면밀하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 3세기 중후반에 마한지역에서는 백제국이 주변 소국까지 수장권을 미치며 이들을 영역화했다. 진한변한 지역에서도 대형 고분이 출현하고 철제무기의 부장이 급증하는 변화가 일어났는데, 사로국이 이러한 변화를 주도하며 주변 소국을 복속시켜 4세기 중반에는 낙동강 중상류 일대를 통괄하는 신라로 탈바꿈했다. 백제와 신라는 주변 소국을 복속했을 뿐 아니라 이들을 통제(지배)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가추었다는 점에서 삼한 소국과는 질적으로 다른 정치체다. 따라서 늦어도 3세기 중후반4세기 중반에는 백제와 신라라는 고대국가가 출현했다고 파악할 수 있다.

 

여호규 2008 <국가의 형성> ≪새로운 한국사 길잡이 : 3판 한국사연구입문(한국사연구회 엮음), 지식산업사, 6881.

 

△ ≪새로운 한국사 길잡이 상표지(다음책http://book.daum.net/에서 얻음)

 

# 삼국 이전의 고조선과 부여를 포함해서 다양한 국가들에 대한 정보는 거의 모두 중국 자료다. 그런데, 제주고씨족보에 나온 탐라의 역사는 소략함에도 국가체제를 띠고 있다. 마치 삼국유사의 단군조선과 가락국기처럼. 이렇게 볼 때, 글쓴이가 지적한 3세기 삼국지<위서 동이전>의 세계에 대한 이해에 다른 각도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삼국사기초기 기록에서 백제와 신라의 내용을 비교하면서 주변 소국의 외형(=정치체)이나마 그려봄도 좋을 듯하다. 국가형성에 관한 여러 가지 이론에 대한 비교와 성격 규명의 공부는 당연히 따라야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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