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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의 한반도와 그 주변_김장석 ≪제3판 한국사연구입문≫

원시시대라는 용어가 19세기 사회다위니즘의 영향을 깊게 받은 것으로서, 제국주의적, 인종주의적 편견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고고학계에서는 이 시대를 선사시대라고 부른다.

한국 역사에서 선사시대의 구분

명 칭

시 기

비 고

구석기시대

기원전 1만년 무렵을 하한

시작은 합의되지 않았음

신석기시대

기원전 6천년 무렵 시작

기원전 43.5천년 무렵을 획기로 봄

청동기시대

기원전 1415세기경 시작

지역에 따라 차이를 보임

초기철기시대

기원전 300기원전 100

후기 청동기 시대, 철기시대 전기 

원삼국시대

기원전 100기원 300

원사原史시대. 문자기록이 있지만 신화적 측면이 강하고 신빙성이 낮아 연구에 직접적으로 이용하기 어려움

 

사회복합화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회 구성원의 관계망이 복잡해지는 과정이며, 또 사회 안팎으로 불평등과 위계가 발생하고 계급으로 공공화해 가는 과정을 일컫는다. 사회 경제적으로 권력에 의해 사회가 통합되어 가는 과정임과 동시에 다양한 구성원의 이해관계에 따라 사회가 분화되어가는 이중적 과정이다.

한반도에서 신석기시대를 정의하는 근거는 토기의 출현이다. 지역에 따라 매우 극심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토기의 무늬와 생계경제 방식에 따라 5개 지역군으로 구분하는데, 가장 이른 시기 유적이 집중된 곳은 동/남해안 지역이다. 기원전 4천년35백년 무렵 급격한 변화로 해양 자원 대신 내륙의 동식물 자원에 대한 의존도가 급격히 증가한다. 이 시기 중서부 빗살무늬 토기문화 확산의 이유가 무엇인지 아지 규명되지 않고 있다. 중서부 지방의 생계경제방식은 남해안과 차이를 보이며, 필요한 자원이 원거리에 있을 경우 집단의 일부를 파견하여 자원을 조달하는 방식을 이용하고 있었다. 농경은 극히 일부 지점에서 제한적으로 행해지고 있었을 뿐이고, 수렵채집경제의 자원다각화 차원에서 극히 부수적으로만 이용되었을 분이기에 신석기시대 농경사회론은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기에 채집, 수렵, 어로 중심의 수렵채집사회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씨족이 중심이 되는 부족사회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이를 입증하는 고고학 자료는 없다.

청동기시대는, 경제적으로는 수렵채집사회에서 농경사회로, 사회적으로는 권력과 불평등이 발생하게 되었다. 토기는 민무늬토기로 바뀌며, 마제석기가 주류를 이루게 된다. 그렇지만, 이 시기를 한국인의 형성과정으로 보는 논의는 근거의 박약함이 지적되었다. 또한 전기 청동기시대와 송국리유형단계 시기로 나누고 있다.

전기 청동기시대는 쌀농사에 크게 의존하는 농럽경제체제였다. 대체로 밭 유적이 다수를 점하지만, 저습지가 발달한 곳에서는 논도 이용되었다. 저장시설이 거의 예외 없이 각 주거지의 내부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시기 농업생산물은 사유재산으로 인정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고고학적으로 볼 때 전기 청동기시대가 엄밀한 의미에서 게급사회였다는 증거는 미약하다.

전기 청동기시대 후반부 충남 북부의 천안아산 일대와 경남 진주 남강 일대에 가장 인구가 밀집하였는데, 기원전 98세기 무렵 천안아산 일대 인구가 급감하면서 다른 지역으로 인구가 확산된다. 이 시기 해양자원의 이용도 재개된다.

송국리유형은 천안 이남의 충청, 전라, 경남지방에만 분포하며, 천안 이북 지역으로는 거의 확산되지 않는다. 경기와 강원 지역에는 기존의 장방형 주거지와 역삼동식 토기를 계속 사용한다. 이 시기에는 대내외적으로 권력과 위계형성의 증거가 나타난다. 이 시기 주거지 내부 저장 시설이 사라지고, 대신 마을의 한편에 군집을 이루면서 분포한다. 마을 주변의 환호環濠와 목책, 중심지 주변의 소규모 유적은 정치경제적 위계가 마을 내부뿐 아니라, 외부까지도 미쳤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비파형동검은 거의 대부분 지배층의 분묘 유적에서만 발견되었으며, 실생활에 응용되었다는 증거는 미약하기에 권력을 이념적으로 뒷받침하는 위세품威勢品이었음을 의미하며 권력발생의 또 하나 증거다. 일본에서 기원전 87세기 무렵 수렵채집사회였던 죠몽시대가 끝나고 농경사회인 야요이 시대가 성립하는데, 야요이의 가장 이른 유적에서 송국리 유형의 물질문화가 유입된 증거가 발견되고 있다.

초기 철기시대라는 용어는 애매한 시대구분 개념이다. 이 시기는 기존의 청동기 문화가 극성을 이루는 동시에 중국으로부터 철기가 도입되기 시작한다는 점을 들어 초기 철기시대라고 명명되었지만, 한반도 남부에서는 철기의 발견례가 많지 않고 청천강 이북 지역에 주로 한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일부 학자들은 후기 청동기시대, 철기의 보급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학자는 철기시대 전기로 부르기도 한다. 이 시기 고고학적 양상은 연진개秦開의 고조선 침입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맞물려 이해되고 있다. 청천강 이북 한반도에는 전국계戰國系 제철기술에 따른 철기가 보급되어 이른바 세죽리-연화보 유형의 물질문화가 형성되고, 한반도 남부는 고조선 유이민 세력의 유입으로 청동기의 양과 종류가 급증하여 세형동검과 원형 덧띠토기가 등장한다. 하지만, 고조선 유이민 세력과 송국리 단계 주민 사이의 정치역학 관계에 대해서는 아직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고 종교나 샤머니즘 등 이념적 조작을 통한 권력재생산 전략이 송국리 단계보다 더욱 강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농경과 실생활에는 홈자귀 등의 석기가 쓰였다. 유적도 주로 무덤이다. 철기의 보급시기와 양상은 지역에 따라 편차가 큰데, 한반도 남부에 철기가 직접 제작되고 사용된 것은 기원전 1세기 한의 제철기술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이후의 일이다. 이 시기 철기는 지배이념의 강화를 위한 상징적 위세품이었다.

원삼국시대삼한시대또는 삼국시대 전기로 부를 것을 주장하는 학자가 있다. 이 시기 고고학적 양상도 지역에 따라 편차가 크다. 경질무문토기(중도식 토기)삼각형덧띠토기와질토기 등의 변화가 보이고, 청동기는 약 150여 년 동안 공존하다 사라지게 된다. 이 시기 철기는 농기구와 무기 등 실생활에 응용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농업생산물의 직접적 통제와 수탈을 통한 경제적, 물리적 지배로 바뀌면서 이러한 전환은 이후 국가형성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 이후 고고학적 조사가 비약적으로 급증하면서 유물중심의 연구에서 선사시대 사회와 경제에 대한 설명으로 경향이 바뀌고 있다. 197080년대의 전파주의적 시각이 곳곳에 남아 있기도 하지만 말이다.

 

김장석 2008 <원시시대의 전개와 사회의 복합화> ≪새로운 한국사 길잡이 : 3판 한국사연구입문(한국사연구회 엮음), 지식산업사, 5267.

 

△ ≪새로운 한국사 길잡이 상표지(다음책http://book.daum.net/에서 얻음)

 

# “한국의 원시시대의 사회복합화 과정은 지역과 시대에 따른 세부적인 차이로 말미암아 일률적으로 규정하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생산기술과 노동력, 이념에 대한 통제로 권력구조를 공고히 확립해 나아가는 과정이라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대외정세 속에서 각 집단이 역동적으로 대응하는 과정이기도 하다”(65)는 전제와 현재의 국경과는 전혀 다른 경계를 가지고 있던 원시시대는 동아시아 지역 전반의 문화변동 과정에 대한 균형잡힌 접근이 필요하다”(66)는 지적은 곰곰 새겨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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