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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사≫를 훑어볼 때 주의할 점_노명호 고리적 이야기

현대인들은 조선시대의 눈으로 걸러진 고려 500년의 역사와 문화를 바라보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한국역사학계는 고리사의 유교사관은 先人의 자료를 통해 기술하고 자신의 설을 지어내지 않는다는 述而不作의 원칙에 철저히 입각했다고 그 실증성과 객관성을 높이 평가하고 강조해 왔다. 그 점은 일면 타당성이 있다. 고리사 15세기 역사서로는 상당히 수준 높은 명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객관성과 실증적 타당성이 충분히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고리사가 아무리 사료에 입각한 서술에 철저하다 해도, 선택 내지는 선정이라는 요소를 소홀히 하면, 중대한 문제점을 갖게 된다는 것에 제대로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다. 한국의 역사학이 이점을 확고히 인식하지 못했던 때문에, 고리사가 그려내는 일그러진 역사상의 한계를 현대의 한국사인식이 그대로 답습한 점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고리사의 역사서술을 보면, 성리학적 이념과 연결되는 유교문화의 사실들과 역사적 측면은 크게 부각시켰다. 반면에 그것과 이질적인 불교문화나 한국고대에 뿌리를 둔 토속문화에(이하 토속문화로 약함) 대해서는 혁파할 대상으로 일방적으로 비판하였다. 두 문화요소와 관련된 사실들은 대부분 역사서술의 대상에서 제외하거나, 지극히 소홀하게 취급하였다. 고리사에 남아 있는 두 문화 요소와 관련된 지극히 적은 기록은, 그 두 문화 자체를 서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부분 다른 역사적 사실을 서술하는 속에 부수된 단편적인 것들이다. 부수적으로 기록 속에 들어가 있고, 조각나고 분산된 그 자료들은 문제의식, 개념, 연구방법 등이 갖추어지고, 다른 보완자료들이 확보되지 않으면, 그를 통한 사실이나 실상을 포착하기가 어렵다. 게다가 현대의 한국 역사학은 술이부작의 편찬 원칙에 철저한 고리사의 뛰어난 점을 부각시키는 데 힘을 쏟은 반면, 역사서술 대상의 선정과 사료 선정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제대로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한 속에 고리사편찬자의 눈으로 걸러진 유교문화만이 부각된 고리시대 역사상이 현대인의 역사인식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고리사에서 소홀히 된 두 문화요소 중 불교문화는 한국근현대에도 최다수 신자를 가졌던 불교의 영향력과 함께 근현대 이후 자료의 발굴과 연구가 지속되며, 고리사의 일그러진 역사인식을 보완해 나갔다. 특히 20세기 후반 이후 연구 성과의 축적이 괄목할만하게 진행되어 그 큰 윤곽을 상당부분 복원하여 제시하고 있다.

불교문화와 달리, 한국고대에 뿌리를 둔 토속문화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간혹 조선시대 자료와 근대의 민속 등을 토대로 고리시대 토속문화 연구의 단초를 열 수 있는 중요한 연구성과가 나와도 그 후속연구들이 제대로 이어지지 못하였다. 예컨대, 1930년대의 한반도북부 지방 화전민 등의 혼속을 조사하고, 조선왕조실록의 혼속에 대한 기록들을 이용한 손진태 교수의 솔서혼率婿婚연구가 그렇다. 이 연구는 고리시대의 사회와 조선전기 사회의 기초를 새롭게 규명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연구였으나, 그 후속연구가 오랜 동안 나오지 못한 채 단절되어 있었다. 그 후 박병호, 최재석 등 법학이나 사회학 쪽 연구자 중에서 그 후속연구가 나오기 시작하였고, 1980년대 이후 소수의 연구자들에 의해 집중적인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몇몇 주제의 연구만으로는 고리시대 토속문화의 윤곽을 어림잡는 것도 어렵다.

연구가 극히 부진한 속에 토속문화의 중요한 기능적 의미도 제대로 파악되지 못하고 있다. 예컨대 앞에서 본 솔서혼의 경우, 고리시대 가족의 구성, 촌락의 구성, 지역사회의 구성, 사회게층 및 사회관계망의 구성에서 필수적 요소로 작용한 측면이 근래의 연구들에서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한 가지를 예를 더 들면, 고리시대 동명숭배나 유화의 숭배, 동명상이나 유화상 및 개성일대 신상의 착의형 나체상양식 들에서 보는 고구리계통의 제래문화는 여러 곳에 분산된 단편적인 자료들로 남아 있다. 그 문화는 고리시대 고구리유민의식을 갖는 광범한 주민의 피지배층은 물론 지배층의 일상 속에서 작용하고 있었다. 근래 중국의 동북공정과 관련하여 고리의 고구리계승의식이 주목되고 있는데, 그러한 면에서도 고리사회에 계승된 이라한 고구리계 토속문화의의 의미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닐 것이다. 근래에 한국사학계에서도 관심이 높아진 생활사 등의 분야를 고려하더라도, 토속문화의 고리시대 전체 문화 속에서의 중요성과 비중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고리사와 같은 조선시대 역사인식의 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한국 현대의 역사학은 21세기에 들어 선 지금도 이러한 토속문화를 대부분 미개척의 영역으로 남겨 놓은 상태이다.

조선 건국 직후 착수된 고려시대 역사편찬의 책임을 맡은 정도전이 高麗國史를 편찬하며, 황제제도를 모두 제후국의 제도로 고쳐서 서술한 후, 그것을 비판하며 사실대로 서술하는 것과 사대명분에 따라 고쳐 서술하는 것의 오랜 논쟁과 대립이 거듭되었다. 그리하여 고리사가 편찬되기까지 반세기에 걸친 오랜 논쟁과 개찬이 거듭된 이유 중의 하나라 고리시대의 참월한황제제도와 관련된 사실들을 어떻게 서술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이러한 오랜 대립은 세종의 중재로 참월하다는 평을 달고, 사실은 사실대로 서술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그러나 황제제도가 들어간 부문만은 삭제한 경우 등은 복원 대상이 아니었다. 현재 고리사에 남아 있는 황제제도와 관련된 기록들은 그에 대한 체계적인 서술의 결과물이 아니라, 거의 불가피하게 남겨 둘 수밖에 없는 상태여서 최소한의 것을 소극적으로 남긴 분산되고 단편적인 것들이다. 고리사에서도 비록 그 양이 적지는 않지만, 그것을 통해 고리의 황제제도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 때문이다.

 

노명호 2013 <황제모습 왕건상과 한국사의 새로운 면> 연천 숭의전 학술 심포지엄, 연천군문화재청, 1820.


# ≪고리사절요≫ 또한 예외일 수는 없겠다. 영삼국지 : 용의 부활을 보고 KBS 대하사극 광개토태왕을 보면 극명하게 견줄 수 있는 장면이 나온다. 누군가가 그리워 기린다는 제사나 사당의 준비물이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앞 영화에서는 소상塑像이 모셔져 있었고, 뒤 사극에서는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 온라인에서 찾은 삼국지 : 용의 부활의 소상 그림이 달랑 하나 있어 여기에 소개한다. 온라인에서 광개토태왕의 위패가 모셔진 장면을 찾을 수가 없었다.




덧글

  • 零丁洋 2013/11/19 00:04 # 답글

    우리가 신라가 아닌 고구려를 계승하였다는 근거들이 상당히 있군요. 한국의 기원을 신라로 축소하려는 의도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에 대한 우리의 권리를 박탈하려는 의도라고보는데 지역주의와 정치적 편향 때문에 이런논리에 동조하는 것을 보면 무척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이런 자료들이 널리 알려지면 진정한 우리 존재를 확인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 고리아이 2013/11/27 17:39 #

    고맙습니다영
    현재로서는 여러 가지 마음으로 뒤숭숭할 뿐입니다영^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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