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저 탐라에서의 8년, 양양에서의 2년 동안의 유배지 생활의 대략이다. 일찍이 탐라에 있었을 때, 앞뒤로 목사ㆍ통판 및 대정ㆍ정의현의 수령은 와서 만나보지 못하지는 않았는데, 기다려주면서 아주 두터이 대해 주었다. 그 가운데 판관 정주는 사람됨이 아주 괴이하고 사나웠고, 송겸은 어리석기가 흙덩이 같았다. 8년 동안 무릇 질병에 따른 의약의 도움과 굶주림과 추위에 따른 옷과 음식의 조달은 죽음에 이르러서야 살았는지 죽었는지를 서로 물을 뿐이었다.
此其八年耽羅ㆍ二年襄陽謫居事略也。 曾在耽羅時, 前後爲牧使ㆍ通判及大靜旌義倅者, 無不來見, 待之, 甚相厚。 而其中判官鄭倜爲人極怪戾, 宋鎌愚劣如土塊。 八年之間, 凡疾病醫藥之救, 飢寒衣食之資, 及死生存沒之相問。
오직 삼촌 인흥군이 처음부터 끝까지 홀로 맡아 그 질병을 도우셨다. 추위와 굶주림에 둘러 쌓인 채, 천 리도 틈도 주지 않고 끊이지 않으셨다. 그밖에 궁가에서는 하나도 안부를 묻지 않았다. 오직 정정옹주께서 한 차례 편지를 주시고는 그 생사를 물으셨다. 순화군 부인께서 향교동 본가를 파시고자 하여 편지를 주셨지만, 이를 저어하셨고, 또 안위를 보이셨지만 끝내 얻지 못하셨다.
唯仁興君三寸終始獨當, 救其疾病。 周其凍餒, 千里無間, 源源不絶。 其他宮家, 一不相問。 唯貞正翁主一番抵書, 問其死生。 順和君夫人欲買鄕校洞本家, 抵書, 怯之, 且示威福而終不得焉。
영동으로 유배지를 옮긴 뒤를 헤아려 보면, 사촌 언니 원외 윤구 체찰사로써 일에 종사하시면 여러 읍을 순력하시다가 본 부에 이르셨을 때, 사람을 시켜 음식과 물건을 보내주어 자못 넉넉했다. 또 관청 일보다 말에 구속되어 서로 보고자 하는 뜻은 이루지 못하였지만 세세한 것은 아니었다. 병란*) 초기, 사촌 동생 원정이 간성에서 영남으로 남향하면서, 내가 살고 있는 집을 지나가다 문 앞에서 헤어지면서도 안부조차 묻지도 못하였다. 사면을 입어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임영**) 대창역에 머물렀는데, 외사촌 언니 도사 윤창원ㆍ생원 윤창운이 새로 정역이 되어 안으로 근심이 되었다. 부인을 거느리고 붙잡힐까 그 땅에서 난리를 피하여 동리 가까운 곳에 살았지만, 꺼리고 서로 만나지 않았다. 적이 생각하면, 이들은 반드시 내 친족으로 나라의 죄로 잡혀 장부***)에 딸려 이미 끊겼고, 친척의 도의로써도 기다리고자 하지 않았으니 그 뜻 또한 그러하다.
量移嶺東之後, 從兄尹員外丘以體府從事, 巡歷列邑, 至本府, 使人送食物頗優。 且言拘於官事, 不得相見之意, 縷縷不已。 兵亂之初, 從弟昌原正自杆城南向嶺南, 行過不佞所寓, 門前而別, 無所問及。 蒙赦, 上京之路歷抵臨瀛大倉驛。 表兄尹都事昌遠,尹生員昌運新丁內憂。 挈妻拏, 避亂于其地, 居在同里咫尺之間, 而諱不相見。 竊想, 此人等必以吾輩獲罪邦國, 屬藉(藉當作籍)已絶, 不欲待以親戚之道, 其意亦然矣。
*) 병란 : 1636년 조ㆍ청 전쟁(병자호란).
**) 임영 : 강원도 강릉.
***) 장부 : 범죄인 명부를 가리키는 듯.
나의 집이 아주 가난하다는 것은 나라 사람이 아는 바다. 일찍이 쌓아 놓은 물건도 없었거니와 또 뒤 따른 형벌과 거듭된 큰 화이겠는가. 무진년(1628, 인조6) 화가 일어난 처음 온 가족이 남쪽으로 옮겨졌고, 무릇 가까운 동네의 친척 집은 서로 다투어 찾아 들어가 집안에 남아 있는 바를 빼앗아 가니, 부끄러움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심지어 글자를 아는 사람도 노비를 보내어 말에 짐을 실은 것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사람들에게는, “그 집은 본디 좋은 물건은 없고, 단지 서책이 아주 많은 까닭에 이를 취하여 감추어두고자 함이니, 일이 바르게 되기를 기다린다.”고 하였으나, 듣는 이들이 비루하게 여겼다. 끝내는 집 사이를 깨끗하게 청소한 것과 같음에 이르렀으니 할 일조차 없었다.
吾家素貧, 國人所知。 曾無所儲之物, 而又從而*)累經大禍乎? 戊辰禍起之初, 一家南遷, 凡隣里親戚之家, 爭相探入, 掠去所餘家藏, 少不爲愧。 甚至識字之人, 送奴馬馱載相繼。 而乃言於人曰: “其家素無長物, 唯書冊極多, 故欲取而藏之, 以待事定。” 聞者鄙之。 終至於家間掃如。 無可爲之。
*) 從而 : ≪孟子ㆍ滕文公上≫
뒤에 인흥군 댁으로부터 본가에서 큰 형수를 모셔 들이고, 형수님으로 하여금 노복을 거느리고, 편안히 맞이하여 이를 지키게 하였다. 이때부터 집안이 조금 정돈이 되었고, 몰래 가재를 훔쳐 간 이가 가끔 도로 가지고 오기도 하였다고 한다.
後自仁興君宅, 招入伯嫂於本家, 使之率奴僕, 安接以守之。 自是之後。 家內稍定。 而偸去家財者。 間或有還給之者云。【此其八年耽羅至下節還給之者云四百餘字印本不載】
탐라는 나라를 통튼 죄인의 땅이다. 그리고 귀양은 국법의 무거운 법례로, 10년 세월이 가장 오래며, 말이 서툰 사람 가운데 가장 파리하고, 사람 가운데 가장 파리한 몸으로 귀양의 무거운 법례를 받아 탐라 죄인의 땅에 유배되었다. 아주 긴 세월을 지내면서 끝내 물고기 뱃속에 장사지냄은 면하여 살아서 서울로 돌아왔다. 다시금 종친의 반열 끄트머리에 든 뒤, 앉아서 태평의 세월을 헤아리게 되었으니, 이야말로 성조가 만든 은혜라 아니할 수 없고, 조상이 착함을 쌓은 경사라 하겠다. 한밤중에 생각하니 감개무량하여 눈물을 때때로 조용히 흘린다.
耽羅通國之罪地。 而流竄國法之重典也, 十年歲月之最久, 而不佞人中之最弱也, 以人中最弱之身, 蒙流竄之重典, 謫耽羅之罪地。 經最久之歲月。 而終免魚腹之葬。 生還輦轂*)之下。 重廁宗班之後, 坐度太平之世。 此無非聖朝生成之恩。 祖先積善之慶。 中夜言念**)。 感淚時零。
*) 輦轂 : ≪三国志ㆍ魏志ㆍ楊俊傳≫; (魏)曹植 ≪求通親親表≫; (宋)陶穀≪清異錄ㆍ白雪姑≫
**) 言念 : ≪詩經ㆍ秦風ㆍ小戎≫
무릇 나의 자손들아! 이로부터 깊이 생각하여 세세토록 충효의 규칙에 더욱 힘쓰라. 이것이 나의 바라는 바다.
凡我子孫! 體念于此。 世世代代。 益懋忠孝之節。 是余所望也。
# 밑줄 친 부분은 옮기기에 부족하여 알려둡니다영
원문은 한국고전종합DB에서, 그림은 천목문화사랑방에서 얻었습니다영^_^))
# 벌써 4년이나 되었네영 2010년 겨울 푸른터맑은의정부21실천협의회 워크숍으로 제주에 간 적이 있답니다영
그리고 제주의 추억을 잊고 있다가 해원군 이건과의 인연으로 다시 숨어 있는 조약돌들을 들추어 보았습니다영^_^))
덧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