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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신자유주의화, 대학의 위기 Modern Corean Clio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대학大學은 어질고도 성스러운 학문이자 그것을 가르치는 장이었다(大學賢聖之道理, 非小學技藝耳; 예기禮記<학기學記>의 댓글). 이를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다. “옛날 교육의 장소로 집에는 숙이 있었고, (500)에는 상이 있었으며, (2,500)에는 서가 있었고, 나라에는 학이 있었다(古之敎者, 家有塾, 黨有庠, 術有序, 國有學).”고 하였고, “사물의 종류를 알아 통달하고 강건하게 서서 일처리에 헷갈리지 않고, 스승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으면 이를 대성이라 한다. 그런 뒤, 인민을 교화하고 풍속을 바꾸기에 넉넉하여 가까운 이가 기뻐 따르고 먼 이가 정으로 따르면, 이것이 대학의 가르침이다(九年知類通達, 强立而不反, 謂之大成, 夫然後, 足以化民易俗, 近者說服, 而遠者懷之, 此大學之道也).”고 하였다. 그래서 예기<대학>에서도 대학의 가르침은 밝은 덕을 더욱 밝혀 인민을 친하게 함으로써 가없는 착함에 이르게 함이다(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고 한 것이다. 학부 때 중국사를 가르치시던 한 스승님께서 광고처럼 말씀하셔서 귀에 못이 박힌 말이다그래서 더욱 다가온다. 비록 도요시마 고이치의 지적처럼 이 내용이 봉건적 후진성과 헨리 지루의 순응주의, 그리고 크리스 헤지스의 자족적 영지 안의 고물古物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유럽 자치’autonomy의 대표인 우니베르시타스Universitas를 동아시아에서는 대학이라고 옮기고 나서, 바로 그 때부터, 근대 자본주의의 침탈과 현대 신자유주의의 폭력으로 대학이 위기에 이르렀다. 마침 이를 살피는 글들이 있어 여기에 소개한다. 개인적으로는 도요시마 고이치豊島耕一 교수의 글이 다가왔지만, 이 땅 대학의 쥐(?) 같은 현실을 볼 때, 세 글 모두를 정리하여 소개함이 마땅하다고 여긴다.

 

먼저 도요시마 고이치는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의 일본학계를 돌아보면서 어용학자권력이나 권익을 위해서 과학적 진리나 양심을 등한시하는 학자라고 가정해보자고 주문한다. 그러면서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관련하여 과학자 조직의 권위와 그 조직이 내리는 결론을 절대화하는 태도는 과학 신관神官또는 과학 승관僧官이라고 이름 붙이고, 이들에 의한 시스템은 과학자 독재또는 전문가 독재라고 불러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그가 지적한 대학사회의 봉건적 후진성은 아마도 헨리 지루가 지적한 순응주의, 크리스 헤지스가 지적한 자족적 영지 안에 숨는 일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대학인은 그 직업상 관찰자라는 습성이 강하지만, 대학사회의 문제에 관해서는 스스로가 주역이며 현상을 책임지는 존재로, 그 행동패턴을 규정하는 것은 문화이며, 개인의 자세, 곧 마음가짐이라고 하면서 단순히 연구를 행할 뿐 그 연구의 사회적인 의미를 깊이 생각하고 상상력을 발휘하라고 주문하고 있다. 끝으로 일본의 국립대학 독립행정법인화가 초래한 문제의 심각성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크리스 헤지스의 말대로 치명적인 상부구조를 지닌 법인형 국가와 생각이 맞닿아 있다고 여겨진다.

헨리 지루의 글을 보면서 관계, 연관, 사이드의 깨어있음따위의 언어적 교감으로만 느낄 때, 부처님을 닮았다는 느낌을 받았다(다만, ‘동맹이라는 언어는 예외다). 그는 지난 30년 동안 민주적 공공영역으로서의 고등교육 또는 대학을 빈사 상태였다고 진단(134)하면서 경제적 다윈주의의 결과가 금융과 신용의 위기만 아니라, 그 동안 공교육과 고등교육은 민주적 가치를 파괴하는 전쟁에 동원돼왔고, 그러한 교육기관은 무자비한 자본주의 질서를 정당화하는 시장 중심적 신념, 사회관계, 정체성, 이해방식을 재생산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해왔음을 보자면(“협잡꾼 양성 공장경영대학원MBA’_윌리엄 블랙William Black), 교육의 위기 현상으로 보는 눈은 적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일반대중 속에 뿌리를 둔 활기찬 정치적 반대세력의 부재 그리고 상아탑의 안락한 공간에 길들여진 지식인들의 순응주의 때문(_스탠리 아러노위츠, 136)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최근 젊은이들의 투쟁에 오감을 투여한다. 젊은이들의 투쟁은 단순히 상위 1%만이 아니라 99%까지 겨냥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대중들이 파편적인 현상들의 상호관계를 인식하고, 스스로를 교육하며, 민주주의 재생을 위한 사회운동으로 나아가도록 힘쓰고 있다고 지적한다. 또한 이것이 오로지 단기적 개혁을 위한 기획이 아니고 그럴 수도 없다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정치운동이며, 이 운동을 위해서는 공적 공간의 재생과 더불어 디지털기술의 진보적 활용, 공공영역의 확대, 새로운 교육의 창조, 민주적 표현과 정체성과 집단적 희망이 조성될 수 있는 장소의 확보 등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바로 그 장소가 대학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등교육의 가장 깊은 뿌리는 도덕적인 것이지 상업적인 게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적 공적 공간으로서의 고등교육을 재생시키자면 무엇보다 시장근본주의자, 종교적 극단주의자, 완고한 이데올로그들에게 맞서야 한다고 주문한다. 대학(=고등교육)은 비판적 주체와 사회적 상상력을 공급하는 공적 영역으로, 학생들이 예민한 예언자적 정의감을 기르고, 비판적인 분석기술을 활용하고, 타자의 권리를 존중하는 윤리적 감성을 계발하도록 할 장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은 공적 가치와 비판적 희망, 그리고 실질적 민주주의를 배양하는 교육적 가능성이 남아있는 매우 드문 공적 영역의 하나로, 학생들은 교육을 통해서 권력이란 마땅히 정치적으로, 도덕적으로 책임을 지는 것과 동시에 공적 문화의 이상과 희망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하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고등교육은 민주주의를 위한 가장 중요한 전투 현장의 하나(135)라고 주장한다.

끝으로, 크리스 헤지스는 헨리 지루와는 제법 다른 시각으로 대학의 위기에 접근하고 있다. 세계경제 붕괴에 대한 책임은 하버드와 MIT가 있는 케임브리지, 예일대학이 있는 뉴헤이븐, 토론토, 파리 등의 정갈한 건물과 강의실에서 금융과 정치권력의 중심지로 곧장 연결된다. 그럼에도 엘리트 대학들은 정직한 지적 탐구를 경멸하고, 자기비판을 멀리해왔다고 비판한다. 대학은 돈에 미쳐가고, 학문은 세상과 동떨어져가고 있다고 하는데, 그 특징 가운데 하나를 소통뿐 아니라 상식까지 가로막는 자기만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144). 그러면서 역사적 기억상실증에 빠져 역사상으로 유일하고 특별하며 과거에서 배울 것이 전혀 없다고 믿으면서 언제까지나 어린아이로 남아 환상 속에 산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대학의 또 다른 사회적 기만으로 권력의 세습과 기만적 평등주의를 지적한다(14650). 마치 한국의 (과거 육사를 포함하여)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가 엘리트 학생들을 빼앗기 위해 갖은 공작을 펼치는 파노라마가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그러면서 학생들에게는 그들이 다른 학생들보다 훌륭하기 때문에 그곳에 있다고 말한다(147). 이 교육기관들은 부유하고 힘있는 가문들을 하나의 부족으로 통합한다(바로 엊그제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 아들을 부정입학시킨 국제영훈중학교 사례!!!). 그리하여 그들은 특권층의 위협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엘리트 계층만이 이해하는 세부사항과 전통을 몸에 익힌다. 그리고 그들은 공식적으로는 얘기하지 않지만, 자기들과 같은 품위와 연줄 없는 사람들을 경멸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문화적 속물이다. 그들의 권위를 떠받치는 기초는 부밖에 없다. 엘리트 대학들은 더 이상 생각하거나 비판하는 학생을 길러내지 않고, 재빨리 토해낼 수 있는 학생 곧, 표준화된 시험에만 의존하고 그로부터 완벽한 성적을 요구하기 때문에, 강의실은 눈치 빠른 게으름뱅이들로 가득하고 부와 연줄을 가진 학생 비율이 비정상으로 높다.

그러면서 미국의 정치경제체제가 파산한 직접 원을을 인문학에 대한 폭력에서 찾고 있다(1505). 인문학을 경시하는 분위기 속에서 지배계급은 단지 체제를 유지하는 해결책만 발견하도록 훈련시킨다(하버드 경영대학원의 사례연구법). 지배계급은 도덕성이 문명의 산물이라는 전통을 거의 알지 못한다. 그들은 도덕적 진공의 산물이다(151). 그리고 이 엘리트 교육기관들의 암묵적 윤리는 엘리트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최대한 많은 돈을 모으는 것이다. 대학총장들은 대개 대기업 임원과 맞먹는 봉급을 받는데, 교육보다는 기금 조성에 온 힘을 쏟는다. 헨리 지루의 지적대로 대학총장이 CEO로 불리고 있다. 한편, 교육에 대한 공격은 앤드루 카네기 같은 실업가들과 자본가들에 의해 1세기 이상 전에 시작되었다고 지적한다. 자본가들은 처음부터 대학이 이윤을 내지 못한다고 불평했다. 그리고 미국에서 1990년 이후 최소 200개 소규모 인문대학들이 문을 닫고, 기업적이고도 영리목적의 대학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뉴욕증권거래소와 나스닥에 등록된 대학도 있다. 그리하여 인문학이 제기하는 도덕사회 문제를 외면함으로써 그들은 우리의 문화를 파괴해온 기업식 구조에 봉사하는 쪽으로 선택하도록 강요한다. 그들은 회사의 이윤을 위해 중병 환자들에게 의료보장 혜택을 적용하지 않는 능력(!)을 발휘하고, 납세자의 돈을 이용해 피에 물든 독재국가들에게 값비싼 무기를 파는 능력을 발휘한다. 그것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그들의 대차대조표에 결코 포함되지 않는다. 오바마는 엘리트 체계의 산물이다. 학위로 무장한 그의 국무위원들 또한 그렇다. 그들에게 역사, 문화, 철학, 종교는 그 핵심에 권위를 전복하고 위협하는 특성이 있다는 이유로, 대중 담론에서 추방시켰다. 악에 저항하는 데 필요한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자질은 도덕적 자율성이다(155). 그 모든 것(제국주의, 엘리트체제, 권력 따위)() 무너질 때, 우리의 썩은 금융제도가 수조 달러의 무가치한 자산과 함께 갈기갈기 찢기고 우리의 제국주의 전쟁들이 굴욕과 패배로 끝날 때, 핵심 권력층도 나머지 우리와 똑같이 무기력하고 자기기만에 빠져있음이 드러날 것이라고 맺고 있다.

 

 

헨리 지루Henry A. Giroux/이승렬 옮김 2013 <사라지는 지식인: 공적 가치의 쇠퇴와 대학의 위기> 녹색평론130, 녹색평론사, 12037.

크리스 헤지스Chris Hedges/김한영 옮김 2013 <지혜의 환상: 돈에 물든 교육과 비판적 지성의 죽음>, 윗 책, 13856.

토요시마 코이치豊島耕一/김형수 옮김 2013 <어용학자 비판이 불가능한 대학사회>, 같은 책, 15768.




덧글

  • 零丁洋 2013/05/30 23:54 # 답글

    인문학이 사라진다는 것은 우리의 행위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겠죠. 행위가 사라진 곳에는 생존과 의식주는 있을지 모르나 삶도 의미도 자유도 비판도 투쟁도 없을 것입니다.
  • r 2013/05/31 01:27 # 삭제 답글

    근데 진심 '경남대' 같은 지잡에 철학과가 있어야하나요;;
  • 지잡 2013/05/31 01:35 # 삭제

    경남대가 성적으로 보면 지잡이지만 경상남도의 인문학중심지 역할을 하는 대학일텐데요.
  • 그런인식노노 2013/05/31 01:48 # 삭제

    지잡// 그런 인식이면 영남대는 영남을 대표합니까? 대구, 경북권에서도 2번째인데;; 경북대는 '경북'만을 대표합니까? PK, TK 통틀어서 영남지역에서 부산대와 함께 1, 2위를 다투지 않습니까? 경남대는 이름만 경남일 뿐 경상남도에서 그리 비중이 높은 대학은 아닙니다.
  • 고리아이 2013/06/01 18:16 #

    경남대든 영남대든
    아니 지방의 한가한 대학이라 하더라도
    돈에만 열중하는 대학은 대학임을 포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영^_^))
  • 고리아이 2013/06/05 09:20 # 답글

    기만적 평등주의deceitful egalitaria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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