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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에서 용산까지 운하가 생길 뻔 Corean Clio

의정부 좌정승 하윤河崙 등이 운하()를 팔 것을 청하였다. 계청啓請은 이러하였다: “마땅히 경기의 군인 1만 명, 경중京中의 대장隊長대부隊副 4백 명, 군기감軍器監의 별군別軍 6백 명, 모두 11천 명을 징발하여 양어지養魚池를 파고, 숭례문崇禮門 밖에 운하를 파서 주즙舟楫을 통행하게 하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우리나라의 땅은 모두 사석이므로 물이 머물러 있지 않으니, 중국의 운하를 판 것을 본받을 수는 없다. 명일 내가 장차 면전에서 의논하겠다.”

임금이 경회루慶會樓 아래에 나아가서 정부에 일렀다: “숭례문에서 용산강龍山江에 이르기까지 운하를 파서 주즙을 통행하게 한다면 진실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다만 모래땅이므로 물이 항상 차지 못할까 의심스럽다.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러 신하들이 모두, “옳습니다.” 하였으나, 오로지 의정부 찬성사 유양柳亮만이, “용산강은 도성都城에 가까운데 어찌 반드시 백성들을 괴롭히겠습니까?” 하였다.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박자청朴子靑, “땅은 모두 수전水田이니 반드시 새지는 않을 것입니다. 개착開鑿의 공력은 1만 명의 한 달 일을 넘지 않으니, 청컨대, 시험하여 보소서.” 하였다. 임금이 깊은 인력人力을 쓰는 어려움을 알고 있었던 까닭에 일을 정지하고 거행하지는 않았다(태종실록26, 태종13(1413) 7월 정유(20)).

 

예전에 하윤의 교언영색巧言令色과 관련한 글을 쓴 적이 있는데영(http://coreai84.egloos.com/5402413)

남대문에서 용산까지 운하를 놓자는 건의를 하네영 

다행히도 조선 초기 제도 확립에 크게 이바지한 유양(1355: 공민4∼1416: 태종16)이 백성들의 괴로움을 이유로 반대하였고, 태종 또한 그러한 마음을 두었던 까닭에 운하 공사는 실행하지 않았네영

마치 6년 전 한 G색귀色鬼가 떠오르면서도, 유양과 같은 인물이 없었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영^_^))


2008년 화재로 사라진 복원 숭례문_노컷뉴스에서 얻음

 




덧글

  • shaind 2013/05/11 20:01 # 답글

    유양 같은 사람이 하도 많아서 운하는 못 파고 사대강만 하고 말았던 건데 기억안나시나보군요.
  • jakethedog 2013/05/11 23:36 # 답글

    지금이야 철도같은 대체수단이 많아서 운하가 효용성이 없어도 조랑말이나 지게밖에 안다니던 조선시대에는 수운이 더 효용성있지않았나요?뭐 인력문제나 물공급문제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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