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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漢陽은 작았다 Corean Clio


2007년에 담은 숭례문

 

일찍이 서울이 언제부터 이렇게 컸을까 하는 의문을 둔 적이 있다. 그러다가 만난 것이 이익의 글이다. 이익은 어떤 이의 말을 빌려 태조太祖가 처음에 도성都城이 지나치게 큰 것을 문제 삼지 않은 것은 평화로울 때 안팎을 방호하기 위한 것이요, 비상시에까지 결사적으로 여기를 지키고 버리지 않겠다는 계책이 아니었을 것이다.”고 하면서 옳은 말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를 서울이라는 도시가 클 필요가 없다는 주장으로 이해했다(http://coreai84.egloos.com/5403010).

그런데 곰곰 다시 살펴보니 이익은 서울이 클 필요가 없다는 주장보다는 서울은 커도 괜찮다는 주장으로 보인다. 이익은 성을 굳게 지키려 한다면 넓은 것은 매우 곤란하다.”고 하면서 지금 서울의 성이나 고려의 개성開城은 전후하여 천 년 가까이 되는 동안 외부에서 적의 침입을 당했을 때에 한 번도 앉아서 지켜본 적이 없었으니 과거의 경험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서울이 크든 작든, 견고하든 부실하든 전쟁 따위의 유사시에 도성 안 백성들의 삶을 더 걱정하면서 가령 성이 견고하고 병졸이 많이 있다 할지라도 그 성안에 사는 사람들의 89할이 축적된 식량이 없고 아침에 벌어 저녁에 먹고, 오늘 마련해야 내일을 살 수 있는 사정이라면 그 많은 남녀노소를 정부가 모두 식량을 공급하여 먹여 살릴 수 있겠는가? 반드시 며칠을 가지 못해서 굶주림과 아우성이 일어날 것이고, 이렇게 된다면 성문을 열고 적을 맞아들이게 될 것은 뻔한 일이다. 마침내 성을 도저히 지켜내지 못하게 된 뒤에 가서야 비로소 서울을 버릴 것을 계획한다면 임금을 적에게 그냥 내어 주는 것이나 무엇이 다르랴?” 하였다.

그러면서 1592년 조일 전쟁 때 선조의 피난을 비판하였을 뿐만 아니라 1950년 한국 전쟁 때 이승만의 피난까지 비판한 내용임을 알게 되었다. 바로 당 현종玄宗과 공민왕의 사례를 들어 비판한 것이다.

 

종전의 예로 보면, 난리를 만나서 임금이 피난길에 오른 때에 더러는 성문을 닫아버리어 남아 있는 백성들을 나오지 못하게 만들고 또 아무 세력도 없는 대신을 임명하여 유도대장留都大將이라고 해 놓으니,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나라에서 내버리는데 저 병졸도 없는 외톨박이가 무슨 재주로 허물어진 판국을 수습하겠는가?

명황明皇이 피난길을 떠날 때에 백성들을 모두 주작교朱雀橋까지 건네주었으니, 지난 일은 그만두고라도 백성을 건네주었다는 이 한 가지 사실이 백성들의 마음을 수습하게 된 것이다. 당이 망하지 아니한 것은 당시의 선심을 베푼 데서 기인한 것이 아니겠는가?

고려 때 홍두적紅頭賊의 난에 공민왕恭愍王이 복주(福州 : 안동安東의 옛 이름)로 피난을 가면서 경성京城의 부녀자와 늙고 어린 사람들을 먼저 성밖으로 내어 보냈으니, 후대에 성문을 닫고 자물통을 채운 것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하겠다.

 

그런데, 태조실록을 살피다 보니 한양이 그렇게 크지 않았음을 짐작하게 하는 자료가 보여 여기에 소개한다.

 

경기도양광도서해도西海道교주도交州道강릉도江陵道 6의 백성을 동원하여 경성京城을 쌓게 했는데, 옛터(舊基)가 넓어 수리하기가 어려운 까닭에 그 반을 줄이게 하였다.(태조실록4, 태조 2(1393) 8월 갑술(1))

 

간관諫官 안경검安景儉 등이 상서上書하였다: “청하옵건대, 경성은 옛터에 따라 쌓게 하소서.” 윤허하지 아니하였다.(태조실록4, 태조 2(1393) 8월 을해(2))

 

도성都城의 역사役事를 시작하였다.(태조실록4, 태조 2(1393) 8월 무인(5))

 

임금이 미행微行하여 남산男山에 올라 성터(城基)를 시찰하고 화원花園에 들어갔다.(태조실록4, 태조 2(1393) 8월 기묘(6))

 

임금이 좌부승지左副承旨 최이崔迤로 하여금 가서 성을 쌓는 원리員吏들의 부지런하고 태만한 것을 검열檢閱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이후로는 날마다 사헌 감찰司憲監察로 하여금 돌아가며 검열(巡檢)하게 하였다.(태조실록4, 태조 2(1393) 8월 경진(7))

 

성을 쌓는 원리로서 역사의 감독에 태만한 사람 14인을 순군옥巡軍獄에 내려 가두었다가, 조금 뒤에 이들을 석방하고, 오직 장군 전오全吾만을 강화 수군江華水軍에 충군充軍시켰다.(태조실록4, 태조 2(1393) 8월 신사(8))

 

 

당시의 경성을 개경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옛터라고 언급한 것으로 보아 고려 때 풍수지리설과 도참설에 따라 건설한 남경南京일 가능성을 상정해 보았다. 안경검 등이 옛터의 크기에 따라 수축할 것을 건의하였지만 불허하였고, 3일 뒤 성 쌓는 일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기사를 보니 개경일 가능성도 있어서 머뭇거리게 된다. 게다가 이어지는 실록 기사에서 화원의 존재와(태조실록2, 태조 1(1392) 11월 정해(10); 태조실록3, 태조 2(1393) 5월 을사(1); 6월 정축(3); 6월 신사(7); 태조실록4, 태조 2(1393) 7월 임술(19); 7월 신미(28); 8월 임진(19)) 5일 뒤 태조가 광명사廣明寺에서 왕사王師 자초自超를 만나고, 소격전昭格殿에 간 기사는 이러한 상정을 더욱 머뭇거리게 한다(태조실록4, 태조 2(1393) 8월 갑신(11)).

그런데, 다시 5일 뒤인 816일 교지의 내용과 이틀 뒤 818일 잔치 기사를 살펴보면 이는 위 도성 역사가 한양임을 굳히게 한다.

 

교지를 내렸다

: “새 도읍인 경기京畿의 전지田地를 고쳐 측량하여 10, 5결로써 등급을 차별하여 정을 만들어 나누어 주게 하라.”(태조실록4, 태조 2(1393) 8월 기축(16))

 

도평의사사에서 경성 수축 도감

京城修築都監의 판사判事 홍영통洪永通안종원安宗源 등에게 왕륜사王輪寺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태조실록4, 태조 2(1393) 8월 신묘(18))

 

816일 교지에 새 도읍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과 전지 측량을 명령한 점이 도성 축성과 연결지을 수 있는 내용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태조는 도성 또한 그리 견고하게 쌓지 않았으니, 처음부터 돌로 쌓지 않고, 흙으로 쌓았다는 점이다(세종실록지리지 경도 한성부). , 이익의 주장대로라면 유사시 피난하기 쉬울 수 있게 한 배려였다. 그렇다면, 오늘날 서울은 왜 이리 큰 것일까? 이익의 주장을 바탕으로 해서 살피자면, 유사시 피난하기 쉽게 한 것일까, 어렵게 한 것일까?

 

2008년 화재로 사라진 복원 숭례문_이글루스 블로거 팬저님( http://panzercho.egloos.com/11017495) 블로스에서 얻음




덧글

  • 고리아이 2013/05/12 00:40 # 답글

    ⓐ 서운관書雲觀에서 상언(上言)하였다: “도선道詵이 말하되, ‘송도松都는 5백 년 터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4백 80년 터이며, 더구나 왕씨王氏의 제사가 끊어진 땅이라.’ 하는데, 지금 바야흐로 토목공사를 일으키고 있사오니, 새 도읍을 조성造成하기 전에 좋은 방위로 이행移幸하소서.” 도평의사사에 내리어 이를 의논하게 하였다.(≪태조실록≫4, 태조 2년(1393) 9월 무신(6)일)
    ⓑ 임금이 성을 시찰하고 수창궁으로 거둥하였다.(≪태조실록≫4, 태조 2년(1393) 9월 임자(10)일)
    --> 머뭇거리게 하는 자료네영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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