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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과 한양 도성 공부하기 Corean Clio

201356노컷뉴스에 실린 이진성 프로듀서의 글 <도성정문 '숭례문'에 가려진 불편한 진실 : 도성과 다른 성문들, 정말 이대로 방치하나?>(http://m.media.daum.net/media/culture/newsview/20130506105123578)은 지난 2008210일 화마에 홀라당 스러진 숭례문을 엊그제 복원되었다고 난리법석을 떠는 기사에 비하면 정말로 이 땅의 한 시민으로서 역사 유적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무엇인가를 곰곰 생각하고 실천하게 하는 글이라 여겨지기에 간단하게 소개한 뒤, 덕분에 둘러 본 조선왕조실록의 한양 도성과 숭례문 이야기를 풀어보도록 할게영^_^))


이진성님은 먼저, “53개월 전 '땅값 보상'에 불만을 품은 한 노인의 방화에 몸을 내어줬다. 숭례문은 자신의 몸을 불사르면서, 우리 사회 도처에서 벌어지는 부동산 투기 개발 열풍과 그로 인해 파괴돼가는 역사문화자원의 비참한 현실을 대표적으로 그리고 극단적으로 고발해주었다.”고 하면서 숭례문이 보여준 것은, 사유재산 극대화를 위한 부동산 개발 때문에 지금도 수없이 파괴돼가는 우리 사회의 역사문화유산과 유적들의 현실이었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에서는, 숭례문 자신을 정문으로 삼은 '한양도성' 그리고 자신과 함께 도성의 문을 이루고 있는 '다른 성문'들이 처해있는 부끄러운 현실이다.”고 꼬집고 있지영

그러면서 한양도성다른 성문들의 현 상태를 살피고 있는데영

한양도성과 관련해서는 성곽 돌을 건물 축대로 쓰고 있는 한국자유총연맹 본부 건물인 남산자유센터, 그 옆 반얀트리호텔은 도성을 땅 밑으로 밟고 서 있고, 한양도성의 보존과 복원을 지휘해야 하는 서울시장의 관저는 혜화문 옆 한양도성에 걸터앉아있다고 지적하고 있지영

 

후손들의 무분별한 개발로 엉망진창이 된 한양 도성_노컷뉴스에서 얻음

 

성문들을 살펴보면서는 숙정문과 혜화문의 잘못된 복원과 원형 훼손, ‘암문暗門의 엉뚱한 알파벳 표기(Rock Gate) 따위를 지적하고 있지영

그러면서, “숭례문의 진정한 복구는 단순한 건축물의 복구가 아니라, 우리가 잊고 있던 역사문화유산에 대한 가치의 복원이며, 그것을 대하는 태도의 성찰이어야 한다. 개발과 재산 증식에 대한 욕구로 공공의 문화재인 역사유적 파괴에 눈을 감아 온 우리 자신에 대한 반성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숭례문을 정문으로 삼은 한양도성다른 성문들을 올바로 보존하는 노력으로 결실을 맺어야 한다. 새롭게 선 숭례문이 지금 우리에게 외치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이 외침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숭례문이 미래의 문이라는 대통령의 구호도 하나의 껍데기에 불과하다.”고 바라보고 있습니다영_이와 관련해서 카나다 여성 역사학자인 마거릿 맥밀런Margaret MacMillan의 일침을 끌어 오고 싶네영

 

()은 비싼 대가를 불러올 수도 있지만, 일단 싸게 먹힌다. 그래서 정치가들은 (말로) 돌보는 척, 세심한 척 보이고 싶어한다.”(마거릿 맥밀런 지음/권민 옮김 2009 역사 사용 설명서 : 인간은 역사를 어떻게 이용하고 악용하는가, 공존, 49)

 

그래서 저도 공부를 초큼 했습니다영^_^))

먼저, 조선왕조 도성 여러 문 가운데 하필 숭례문을 정문正門이라고 할까영?

아마도 남쪽으로 향해 있기 때문일 터, ‘의 우리말은 인데영

앞문을 정문으로 쓰지, 뒷문을 정문으로 쓰지는 않지영

그럴 듯하지만, 임금이 된 이는 북쪽을 뒤로 하고 남쪽을 앞으로 하여 정치를 하기 때문에 남쪽이 이 된 것이랍니다영

그래서 숭례문을 정문이라고 한답니다영

조선왕조실록에는 정남正南이라고 소개하고 있지영


조선왕조실록의 숭례문_조선왕조실록누리집에서 얻음

 

그런데, 이진성님의 글 가운데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대목이 두 군데 보여 몇 자 더해봅니다영

먼저, 글쓴이는 숭례문이 국가적인 중죄인을 재판하고 처벌하는 정치적인 선전장이라고 하였는데, 제가 아는 바로 중죄인을 재판하고 처벌하는 곳은 포도청과 군기시 앞이나 서소문 밖으로 알고 있거든영

 

왕산적하王山赤下가 우리나라에 죄를 졌으므로 조정에서 심사손을 보내어 추국하고 현장에서 형을 집행하였다(중종실록71, 중종 26(1531) 8월 기축(8)).

 

죄인 심암을 당고개에서 형을 집행하였다(선조실록21, 선조 20(1587) 4월 계해(4)).

 

정여립의 시체를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추형追刑하였는데 백관을 차례대로 서게 하였다(선조수정실록23, 선조 22(1589) 10월 을해(1)).

 

죄인 홍호와 희비는 당고개唐古介에서 형을 집행하였다(선조실록135, 선조 34(1601) 3월 갑진(6)).

 

아울러 철물鐵物 저자 거리에서 형을 집행하였다(광해군일기66, 광해 5(1613) 5월 신유(4)).

 

드디어 당고개堂古介에서 참하도록 명하였다. 다음날 이어 전교하여, 유생들이 죽 늘어선 가운데 서소문 밖에서 추형하였다(광해군일기93, 광해 7(1615) 8월 무자(14)).

 

죄인 김경남金慶男을 당일 군기시軍器寺 앞길에서 형을 집행하였다고 아뢰었다(광해군일기94, 광해 7(1615) 8월 무진(24)).

 

역적 허균許筠하인준河仁浚현응민玄應旻우경방禹慶邦김윤황金胤黃을 서쪽 저자거리에서 정형正刑하였는데, 그때 백관에게 명하여 차례대로 서게 하였다(광해군일기131, 광해 10(1618) 8월 경진(24)).

 

승복한 역적 설구인을 서쪽 시장에서 정형(正刑)에 처하였다.유생에게 명하여 차례대로 서게 하였다.(광해군일기133, 광해 10(1618) 10월 갑자(9))

 

숭례문崇禮門 밖의 무신년에 목을 벤 곳에서 금오 당상이 친히 가서 정법正法하도록 하라(영조실록84, 영조 31(1755) 5월 정축(4)).

 

23일에 김직재金直哉김백함황보신皇甫信이 죄를 자백하였으므로 철물교鐵物橋 앞에서 형을 집행하였다(<김직재의 옥사> 연려실기술19).

 

당고개에서 사형을 집행하였다(<중 처경處瓊의 옥사> 연려실기술33).

 

김응룡은 군기시 앞에서 형을 집행하고, 김대기는 당고개에서 형을 집행하였다(응천일록5 경오년(인조 8: 1630) ).

 

금부에 죄인 원충립을 당고개에서 형을 집행하고 아뢰었다(115)... 죄인 정후엄과 권계를 군기시 앞에서 형을 집행하였다(210)... 죄인 영이박선검을 군기시 앞에서 형을 집행했다... 죄인 권낙을 군기시 앞에서 형을 집행하고 아뢰었다(211)... 죄인 권낙을 군기시 앞에서 형을 집행하고 아뢰었다(213)... 문일광을 군기시 앞에서 형을 집행하고 아룄다(220)... 정한양천식은 군기시 앞에서 형을 집행하였다. 가도사 이면李沔이 죄인 정단의 아비 정숙鄭潚을 교형絞刑에 처하는 일로 무안務安에 나갔다(222)... 죄인 권순權純을 당고개에서 형을 집행하였다(36)... 죄인 박희집을 군기시 앞에서 형을 집행하고 아뢰었다(311)... 유지수이일명을 군기시 앞에서 형을 집행하고 아뢰었다(313)... 금부에서 성지도를 군기시 앞에서 형을 집행하고 아뢰었다(318)... 죄인 유지환과 정진을 가형하려 하자 승복하므로, 군기시 앞에서 형을 집행하였다(319)... 죄인 박광선(朴光先)을 당고개에서 형을 집행하고 아뢰었다(321)... 여후망을 군기시 앞에서 형을 집행하고 아뢰었다(326)(응천일록5 신미년(인조 9: 1631)).

 

위 조선왕조실록 기사 가운데 숭례문 밖에서 형을 집행한 사례는 영조 때인 에만 보이고 있네영

처형 장소로는 당고개가 가장 많이 보이고, 그 다음으로 군기시, 그리고 철물교철물 저자 거리서쪽 저자 거리 등이 보이고 있네영

그런데 에서 많이 나타나는 군기시는 동국여지비고에 따르면, 서부 황화방皇華坊에 있다고 하니까, 아무래도 숭례문에서 가까울 듯하네영

좀 더 살펴보아야만 할 내용이네영


둘째, 숭례문이 중국 사신을 전송 내지 접견하는 주요 외교행사의 장으로 활용하였다고 하는데영

실록을 살펴보면, 지방관으로 나아가는 관리를 배웅하거나, 청으로 가는 조선 사신들을 전송한 사례를 보이고 있지만, 청 사신의 경우 벽제역 방면에서 오가는 까닭에 서대문인 돈의문을 이용할 듯한데영

세종실록에는, “예조에서, ‘전부터 중국 사신은 모두 모화루慕華樓에서 맞고 보내고 하면서, 표문表文을 배송拜送하는 것은 남대문 밖으로 그치니 합당하지 않습니다. 앞으로는 표문을 배송하는 것도 모화루에 가서 하기를 청합니다.’라고 알리니, 그대로 따랐다.”(세종실록29, 세종 7(1425) 7월 을묘(18))고 하여 돈의문 서북쪽에 있던 모화루가 중국 사신들을 위한 주요 장소로 사용하기를 건의하고 있네영

여기서 남대문 밖 배송의 객체가 사신이 아니라 표문이라는 점에서 남대문이 중국 사신의 접대와 배웅을 위한 곳이었다고 하는 지적은 좀 더 살펴보아야 할 내용이라 생각해영

선조 때 이르러 1592년 조일 전쟁으로 명 장군을 맞이하거나 보낼 때, 남대문을 쓰기도 하였는데, 이헌국(李憲國, 1525: 중종201602: 선조35), “당초 임금께서 중국 장수를 영접할 때 반드시 남대문 밖 연못가에서 하다가 대간의 계청에 따라 강가에 나가 영접하는데, 이 같은 풍설風雪 속에 매일 강가에 거둥하시는 것은 매우 미안합니다. 또 예부터 중국 장수는 으레 홍제원弘濟院에서 영접하였습니다. 지존의 몸이 멀리 나가 수고하시는 것은 심히 부당합니다. 나라 임금의 거둥이 어찌 이래서야 되겠습니까.”라고 지적(선조실록109, 선조 32(1599) 2월 임자(2))하고 있네영

, 임금이 직접 명 장군들을 만나러 가지 말 것과 홍제원에서 영접하기를 건의한 내용으로 홍제원 또한 숭례문보다는 돈의문이 합당할 듯하네영

이와 비슷한 지적이 광해군대에도 보이고 있네영


사헌부에서, “선왕조에서는 조사詔使가 나올 때에 임금이 모화관에서 조서를 맞이하고, 대가大駕가 돌아오면서는 신문新門을 거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유독 임오년에만 곧바로 남대문을 향해서 회가回駕하여 그 뒤부터 이를 따라서 마침내 규례가 되었습니다. 한때의 결정을 신들 역시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지난번에 사제賜祭하는 중국 사신이 왔을 때에는 백관들이 길을 메우고 둘러싸 행렬이 구분되지 않아서 보기에 놀라웠고 체면을 크게 손상시켰는데, 이는 대개 조사와 대가의 행차가 앞뒤로 서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이 두 조항을 가지고 각별히 헤아려서 좋은 쪽을 따라 시행하게 하소서.”라고 알렸다(광해군일기17, 광해 1(1609) 6월 경술(1)).


, 숭례문에서의 조서 맞이나 사신 맞이가 정식은 아니라는 지적이지영

태평관太平館이 숭례문 안 황화방皇華坊에 있었고, 모화관慕華館이 돈의문 서북쪽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영

셋째, 풍수지리 때문에 숭례문의 바닥을 높이려고 한 적도 하였네영

 

경복궁의 오른팔은 대체로 모두 산세山勢가 낮고 미약하여 널리 헤벌어지게 트이어 품에 안는 판국이 없으므로, 남대문 밖에다 못을 파고 문안에다가 지천사支天寺를 둔 것은 그 때문이었다. 나는 남대문이 이렇게 낮고 평평한 것은 필시 당초에 땅을 파서 평평하게 한 것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이제 높이 쌓아 올려서 그 산맥과 연하게 하고 그 위에다 문을 설치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또 청파역靑坡驛부터 남산까지 잇닿은 산맥의 여러 산봉우리들과 흥천사興天寺 북쪽 봉우리 등처에 소나무를 심어 가꿔서 무성하게 우거지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세종실록61, 세종 15(1433) 7월 임신(21)).

 

풍수지리에 바탕을 두어 숭례문의 평평한 땅을 높이 쌓아 올리고자 하였으며, 그 바깥에는 연못을 파 관악산 화기火氣를 막으려 한 것이지영

이와 관련해서는 세조 때 풍수학風水學 훈도訓導 최연원崔演元의 지적(세조실록34, 세조 10(1464) 9월 정사(7))도 살펴볼 필요가 있네영

 

말하는 자들이, "남대문의 내맥來脈이 약하고 편편한 것이 흠이 된다." 하였으나, 의룡경疑龍經, "객산客山이 천리에서 와서 조회한다."고 하였으며, 동림조담洞林照膽, "안산案山이 보이는 방소方所에 와서 조회하여 빼어난 것이 응룡應龍이 된다."고 하였으며, 지남시指南詩, "안산 밖의 정조正朝하는 봉이 빼어나면 문장文章과 공업功業이 조정에서 떨친다."고 하였으니, 백악산白岳山의 오른쪽 팔뚝이 회전하여 준거蹲踞하고, 다음에 평강平岡을 짓고 다시 목멱산木覓山이 일어나, 주작朱雀이 되어 내려와서 수구水口를 회진回鎭하여 바로 선궁仙宮에 합하니, 백호白虎가 안산이 된 것입니다. 그 평강平岡의 땅을 지음에 관악산冠岳山이 속리산俗離山으로부터 멀리 뻗어 내려와서 조회하니, 이것이 이른바 "천리에서 와서 조회한 안산 밖의 봉이 빼어나는 것."입니다. 만약 이 봉우리가 없고 목멱산이 가리어 밖의 조회하는 봉이 보이지 않으면 보감寶鑑에서 말한바 "삼양三陽의 오로지한 것"입식가入式歌에서 말한, "가까운 안은 낮고 먼 안이 높으면 한 거듭 안이 한 거듭 손에 비한다."는 것에 어떠하다 하겠습니까? 의룡경, "명당明堂이 관대하면 기운도 관대하고 안산이 핍박하면 사람도 흉완兇頑하며, 안산이 와서 나에게 항복하면 사람이 인자하며 착하고, 내가 가서 안산에 복종하면 귀인貴人이 천하다."고 하였으니, 승문원承文院의 좌지坐地는 주산主山이 저하低下하여 안산에 복종하였으며, 안산이 고준高峻하고 핍박하여 밖의 조산朝山이 보이지 않으므로, 이는 사람이 흉완하며 귀인이 천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옛 어진이(前賢)의 논한 뜻을 고열考閱하여 보면, 승문원의 좌지는 가화假花가 되고 경복궁景福宮의 명당은 간과 진이 되는 것을 분명히 보겠습니다.

 

대체로 최연원은 숭례문의 터 높이에 대해서는 크게 염려하지 않은 듯한 내용입니다영

그런데, 남대문 밖 연못은 지금 어디 있을까영(중종실록53, 중종 20(1525) 3월 을해(16); 선조실록109, 선조 32(1599) 2월 임자(2))

 



후손들의 무분별한 개발로 엉망진창이 된 한양 도성_노컷뉴스에서 얻음

 

한편, 한양 도성과 관련해서는 수문이 모두 다섯 곳이 있었네영

세종실록에 딸린 지리지 경도 한성부에 딸림글細註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여영

 

태조太祖 5년 병자(1397) 봄에 각도의 민정民丁 11876명을 모아 도성을 쌓기 시작하였는데, 정월 15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2월 그믐날에 역사를 파하니, 번와燔瓦 및 석회군石灰軍이 또 1759명이었다. 가을에 이르러 또 민정 79431명을 모아서 813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9월 그믐날에 역사를 파하였으며, 금상今上 4년 임인에 태종의 명으로 성을 수축하여 토성土城을 모두 돌로 바꾸었는데, 8도의 군사 총 3224백 명을 모아, 정월 15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2월에 마치었다. 성 동쪽에, 처음에 수문水門 셋을 열었는데, 장마를 만나면 (문이) 막히는 것을 없애고자 둘을 더 만들었다.

 

이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도성이 처음에는 토축이었다가 세종 4(1422)에 석축으로 바뀌었음도 전하고 있네영

한편, ‘장행랑長行廊이 있는데영(태종실록23, 태종 13(1413) 5월 갑오(16))

장행랑은 임금을 비롯한 왕족과 고관대작들이 통행하는데, 눈비에 지장이 없도록 지붕을 씌운 보도라고 할 수 있겠어영

당시 종루鍾樓로부터 서북은 경복궁景福宮에 이르고, 동북은 창덕궁昌德宮과 종묘宗廟 앞 다락문(樓門)에 이르며, 남쪽은 숭례문崇禮門 전후前後에 이르니, 이루어진 좌우의 행랑이 모두 1,360간이라고 소개하고 있네영

그런데, 이듬해 태종은 스스로 태조太祖가 도읍을 세우고, 내가 새로 행랑을 지어서 경읍京邑의 체모가 대개 겉이나마 완성되었지만, 다만 남대문南大門 안의 행랑을 아직 세우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고 전하는데영(태종실록27, 태종 14(1414) 2월 무신(4))

다시 5개월 정도 지난 뒤에는, “종루에서 남대문에 이르기까지 종묘 앞 다락문에서 동대문東大門 좌우에 이르기까지 행랑을 짓고자 한다. 내가 이미 백성들에게 원망을 들었으니, 오히려 조성造成하기를 끝마쳐서 자손을 연익燕翼하겠다. 마땅히 충청도강원도 양도의 연례로 작취斫取하는 재목材木을 가지고 짓도록 하라.”(태종실록28, 태종 147월 임진(21))고 하여 행랑의 건축 시기에 혼란이 오지만, 이 또한 제법 규모를 지닌 건축물이라고 여겨지네영

끝으로 ‘Rock Gate’로 소개한 암문暗門의 알파벳 표기는 ‘Secret Gate’보다는 ‘Castle Exit’가 마땅할 듯하네영_제가 알파벳에는 약해서 강호제현의 채찍을 기다립니다영^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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