丸都今江界也。 江界古時高句麗國都, 而渤海時爲桓州, 屬鴨綠府。 高麗時始稱江界。 其山川險阨, 與吉林烏喇彊事相接, 特鴨綠一帶界之而已。
환도는 오늘날 강계다. 강계는 옛날 고구려 국도였고 발해 때에는 환주로 압록부에 딸렸다. 고려 때 비로소 강계라 불렀다. 그 산천이 험하면서도 요충지로 길림 오라와 서로 붙어 국경의 업무를 하는데 특히 압록강 일대 경계와 관련한 일일뿐이다.

△ ≪광여도≫ 정평부 상검산과 하검산_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얻음
緣江上下, 雖設鎭堡, 然賊路徑捷錯互, 湊于江界。 當丁卯丙子時冦亂, 獨能免搶掠殺戮者, 淸人方在瀋陽, 取路龍灣, 其由興京者, 皆出昌城, 故不復迂入江界。
강가 위 아래로 비록 진보가 설치되었지만 적들의 이동로와 지름길 등이 서로 섞여 강계에서 모인다. 정묘년(1627)과 병자년(1636) 외적의 난리를 당했을 때, 홀로 노략질과 살육을 면했던 것은 청인이 당시 심양에 있어서 용만*)으로 길을 향했는데, 그것이 흥경**)에서 유래한 것이 모두 창성***)으로 나왔기 때문에 멀리 강계로 돌아갈 필요가 없었다.
*) 용만 : 의주의 고려 때 이름. ≪신증동국여지승람≫53 평안도 의주목.
**) 흥경 : 흥경은 지금 청(淸)이 일어난 땅이다. 우리 역사에서 말하는 파저강야인(婆豬江野人)이 바로 그것인데, 두 갈래 물 중간에 놓여 있다. 북쪽에 있는 것은 요하(遼河)로 들어가고 남쪽에 있는 것은 압록강으로 들어가는데, 이것이 바로 파저강이다. 흥경은 창성(昌城)에서 100여 리의 거리이고, 만포(滿浦)까지는 400리다. 그 사이에 만차령(萬遮嶺)이라는 고개가 있는데, 강과 고개 사이가 60∼70리쯤 되며, 이곳은 방목장(放牧場)이다. 의주에서 솔고(率古)로 가는 다른 길을 경유하면 만차령을 거치지 않고 갈 수 있다. 만포와 강계(江界)가 중요한 땅이기는 하나 적유령(狄踰嶺)의 잔도(棧道)가 험난하고 거리가 멀므로 곧장 휘몰아쳐 갈 지역은 아니다. 다만 창성ㆍ삭주(朔州)ㆍ의주(義州)가 염려스럽기는 하나 창성에서 시경(時梗)을 거쳐 가면 운산(雲山)에 갈 수 있고, 삭주에서 대삭주(大朔州)를 지나면 귀성(龜城)에 갈 수 있고, 의주에서 용천(龍川)을 지나면 철산(鐵山)에 이르게 되므로 이 세 군데의 노선이 가장 요해처(要害處)다. 병자년 난리에 의주에서 곧장 본토로 쳐들어온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현재 시경ㆍ대삭주ㆍ귀성ㆍ철산에는 모두 옛적 성터가 있다고 한다(<천지편 하 지리문 흥경> ≪성호유선(星湖類選)≫1). 한편, 중국학계에서는 오늘날 랴오닝 성(遼寧省) 푸순 시(撫順市) 신빈 현(新賓縣)으로 추정하고 있다.
***) 창성 : 평안북도 창성. 고려 때 장정현(長靜縣)ㆍ창주 방어사(昌州防禦使)ㆍ이성부(泥城府)ㆍ이성만호부(泥城萬戶府) 등으로 불렸다. ≪신증동국여지승람≫53 평안도 창성도호부.

△ ≪광여도≫ 창성부_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얻음
然江界之四郡, 以饒蔘之故, 胡人越境來采者甚衆。 江界府發丁壯, 以把守楸坡等八鎭, 亦如之。 四五月之交蔘苗始抽, 而把守者謂之苗把; 五六月之交蔘子色丹, 而把守謂之丹把; 六七月之交蔘葉向黃, 而把守謂之黃把。 採苗不如採丹, 採丹不如採黃。 故苗把頗踈, 丹則稍密, 黃則尤密, 方其赴把也, 下令犯禁, 誅其身, 妻子沒爲奴婢, 條目甚纖悉。
그런데 강계의 사군*)은 산삼이 많은 까닭에 여진족들이 국경을 넘어와 캐가는 이가 아주 많았다. 강계부에서는 정장을 뽑아 추파 등 여덟 진보**)에 경계를 서게 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4ㆍ5월 교대하는 이는 산삼의 싹이 비로소 땅에서 솟아나 이 때 경계 서는 이를 ‘묘파’라 부르고, 5ㆍ6월 교대하는 이는 산삼의 씨앗 빛이 붉어 이 때 경계 서는 이를 ‘단파’라 부르며, 6ㆍ7월에 교대하는 이는 산삼의 잎이 누렇게 되어 이 때 경계 서는 이를 ‘황파’라 부른다. 묘파에 뽑힌 이는 단파에 뽑힌 이보다 못하며, 단파에 뽑힌 이는 황파에 뽑힌 이보다 못하다. 따라서 묘파에는 자못 (경계가) 소홀하고, 단파에는 점차 (경계가) 세밀해지고, 황파에는 아주 (경계가) 세밀해져서 황파 경계에 나갈 즈음에서는 내리는 명령의 금제는 어기는 이는 사형에 처하고 처자는 노비가 되는데, 금제 내용이 아주 세세한 데까지 미친다.
*) 사군 : 세종 때 강계 부근에 세운 4군. 여연(閭延)ㆍ자성(慈城)ㆍ무창(茂昌)ㆍ우예(虞芮) 등을 가리킨다.
**) 추파 등 여덟 진보 :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고산리보(高山里堡)ㆍ추파보ㆍ상토보(上土堡)ㆍ외괴보(外怪堡)ㆍ벌등포보(伐登浦堡)ㆍ고합보(高哈堡, 1518년 목책으로 세움)ㆍ마마해보(麽麽海堡, 1518년 석성으로 세움)ㆍ황청보(黃靑堡, 1500년 목책으로 세움)ㆍ 종포보(從浦堡, 1500년 목책으로 세움) 등 모두 아홉 군데다(≪신증동국여지승람≫55 평안도 강계도호부 관방, 16세기). 또한 이긍익은 추파보ㆍ벌등포보ㆍ종포보ㆍ욋괴보(外叱怪堡)ㆍ마마해보(馬馬海堡)ㆍ등공구비보(登公仇非堡) 등 여섯 곳과 고합보와 황청보는 폐지되었고, 평남보가 빠져 있다고 전하고 있다(≪연려실기술별집≫17 <변어전고ㆍ진과 보>, 18세기). 그리고 이규경은 독로강(禿魯江) 가의 7보(七堡)로, 추파보ㆍ마마해보ㆍ신광보(神光堡)ㆍ평남보(平南堡)ㆍ황청보ㆍ종포보ㆍ상토보 등을 소개하고 있다(<경사편 5ㆍ논사류 1ㆍ폐사군의 본말에 대한 변증설> ≪오주연문장전산고≫, 19세기). 한편, 국가 공식 기록인 ≪만기요람≫(1808)에서는 마마해보(馬馬海堡)를 빼고는 모두 ‘진(鎭)’자를 붙여 추파진ㆍ종포진ㆍ상토진ㆍ외괴진ㆍ벌등진ㆍ고산리진ㆍ만포진(滿浦鎭) 등 여덟 곳을 소개하고 있다(<군정편 4ㆍ관방ㆍ평안도> ≪만기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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