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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큐의 고려 기와_니시타니 다다시 백두산 이야기

한국 계통 유물의 류큐 유입 시기를 생각하면 먼저 계유명 고려 기와에 대해서는 다른 고려 기와와의 비교에 따라 11∼13세기까지 소급할 가능성이 있다. 그 경우 류큐의 도질 토기 일부에는 계유명 기와와 타날(打捺) 기법의 공통되는 점이 있고 따라서 같은 시기의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류큐와 한반도의 교류사는 류큐에 관한 한국 측 문헌 사료인 ≪고려사≫ 기록 이전으로 소급하게 된다. ≪고려사≫권137 창왕 원년(1389)조에 따르면 류큐국 중산왕 찰도(察度)는 아들 옥지(玉之)를 사절로 파견하여 왜구에게 약탈된 고려인을 송환하고 방물로서 유황, 소목(蘇木), 후추와 갑주를 바치고 있다. 그리고 이때 류큐로부터의 사절은 이제껏 없었던 후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이미 11∼13세기에 류큐와 고려 간의 교류, 그것도 와도(瓦陶) 요업 기술의 전수라는 커다란 일이 있었다고 하여 그 계기나 구체적 경과를 바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최근 연구에 따라 11, 12세기 일본의 와당 문양에 고려 기와의 영향이 현저하다는 점이 분명해지고 있음을 고려하면 일본과 고려의 교류사를 크게 평가하는 견해의 연장선상에서 류큐와 고려의 교류를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한반도와 남부 아시아 도서와의 교류사 자료로서 거론된 남부 아시아에서 나는 조개 문제가 있다. 경북 경주는 신라 왕도로서, 또는 고려의 동경(東京)으로서 번영한 곳인데, 여기에는 분황사 터가 있다.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634)에 창건되었는데 이 절의 석탑에서 1915년에 행해진 수리 때, 2층 탑신 중앙으로부터 석함에 안치된 장엄구가 발견된 바 있다. 그 안에는 확실히 삼국시대 신라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유물과 함께 고려시대의 전화(錢貨)가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숭녕중보인데 숭녕 연간 곧 숙종 7년(1103)에서 예조 원년(1106) 사이에 주조된 것이다. 이것들과 섞여서 남부 아시아에서 나는 조개(이모가이)가 있는데, 혹시 그것이 고려의 것이라면 숙종대 중수할 때에 비로소 안치한 것이라 할 수 있고, 그렇다면 이 조개는 12세기 초 무렵 남방으로부터 한반도에 전해진 것이리라.

 

 

△ ‘계유명고려와장조(癸酉銘高麗瓦匠造)’ 명문 기와

 

# 西谷正 1981 <高麗ㆍ朝鮮兩王朝と琉球の交流: その考古學的硏究序說> ≪九州文化史硏究所紀要≫26, 九州大学九州文化史研究所; 尹龍爀 2007 <高麗ㆍ朝鮮과 琉球의 交流: 그 考古學的硏究序說> ≪錦江考古≫4, 忠淸文化財硏究院, 160∼161쪽.

 

도움받은 곳

http://ryukyushimpo.jp/news/storyid-41331-storytopic-121.html(琉球新報)

http://www.kagemarukun.fromc.jp/page112b.html(龍福寺跡)

http://www.geocities.jp/djptd603/seiden-naibu.htm(首里城正殿 復元について)

http://syurijyou-kigen.seesaa.net/category/5448057-1.html(首里城の起源を探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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