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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내 인간의 이동과 독립운동_쑨원ㆍ간디ㆍ호치민ㆍ판보이차우 백두산 이야기

쑨원孫文은 1877년 하와이로 건너간다. 그 뒤 홍콩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의사로 활동하면서 정치적 관심을 키워간다. 1894년 청일전쟁이 한창일 무렵 하와이에서 흥중회興中會를 설립하고, 1895년 광저우에서 반청봉기를 시도하다가 실패한 뒤 런던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대영박물관에서 약 9개월간 독서에 열중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단련하여 삼민주의의 커다란 기둥인 민생주의를 발견한다.

간디는 인도의 여느 엘리트처럼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자 1888년 영국으로 건너간다. 1891년 법정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인도로 돌아오지만, 변호사 업무가 뜻대로 풀리지 않자, 남아프리카로 간다. 남아프리카에서 인도인과 아프리카인에 대한 혹독한 인종차별을 직접 경험하는 간디는 잘 알려져 있듯이 이에 대항해 투쟁하면서 민족의식을 키워간다. 그렇지만, 남아프리카 전쟁 때와 1906년 줄루족 반란 당시 영국 측을 지지하는 지원활동을 하고,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영국의 전쟁 행위를 지지한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18년 6월 인도인 청중을 향해 ‘자치주의자’로 구성된 민족단체를 만들어야 하며, “그들은 제국을 위해 싸우러 가는 것이다. 이 전쟁은 단지 제국 내에서 파트너가 되기를 바라는 까닭에 싸우는 것이다”라고 연설한다. 아직까지 간디는 영국 제국주의를 비판하지 않는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과의 협력을 걸었던 기대는 완전히 배신당하고, 간디는 반영민족운동의 발걸음을 내딛는다.

호치민은 견습 요리사가 되어 1911년 프랑스로 건너가 아프리카와 미국ㆍ영국 등지를 돌아다닌다. 1919년 프랑스 사회당에 응우옌아이쿽(阮愛國)이라는 이름으로 입당한 그는 국제공산주의 운동을 가까이하면서 민족독립을 추구하는 태도를 강화해나간다. 호치민은 제1차 세계대전 후 파리강화회의에서 <베트남 인민의 요구>를 발표할 때, 일본이 조선인을 일본화하려는 데 대해 프랑스인은 자국인과 베트남인의 불평등을 영원히 유지하려 한다고 프랑스를 향해 더욱더 강한 비난의 화살을 돌린다.

그런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를 거머쥐면서 일본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일본으로 들어오는 아시아인들이 많아진다. 대표적인 인물로 베트남의 판보이차우潘佩珠가 있다. 그는 베트남에서 프랑스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운동을 시작하면서 러일전쟁을 서양에 대한 아시아의 투쟁으로 보고 베트남 민족운동에 대한 조력을 얻고자 1905년 일본을 방문하고, 베트남 청년들에게 일본 유학을 권장하는 동유운동東遊運動을 주도한다. 그러나 1907년 일불협약을 맺고 제국주의 국가들과의 협력관계를 드러내자 일본이 백색인종에게 영합해 황색인종을 억압하고 있다고 강력하게 비난한다. 이제 일본에 대한 아시아인들의 기대는, 일본이 제국주의 국가로서의 성격을 노정하면서 비판적으로 변해간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에 기대한 또 다른 이가 바로 쑨원인데, 1905년 도쿄에서 중국동맹회를 결성한다. 그 뒤 일본의 태도에 대한 비판을 강화하면서도 중국과 제휴할 수 있는 아시아의 일원으로서 일본에 대한 기대를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도 여전히 품고 있는데, 1923년 고베에서 발표한 <대아시아주의>에서 일본은 ‘서방 패도의 앞잡이’가 되지 말고 ‘동방 왕도의 간성’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간디는 1907년 일본에 대해 “일본에서 펄럭이는 것은 실은 영국의 깃발이지 일본의 깃발이 아니다”라고 예리하게 비판적으로 논평한다. 타고르는 1916년 일본을 방문한 뒤 제국주의 국가를 좇는 일본의 향방에 경종을 울린다.

 

분명히 일본은 아시아에서 일어나는 인간들의 흐름 가운데 일부를 끌어당겼으나, 끝내 아시아인들에게 비판받는 대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세계의 조류가 제국주의 세계 체제의 해체라는 방향으로 뱃머리를 돌리려 할 때 일본은 새롭게 제국 확대의 길로 나아가려 했다. 그런데 그런 일본에서조차 아시아 일원으로서의 모습을 추구해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인도의 민족운동가 중 일부가 그랬는데,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의 인도 국민군으로 이어지는 조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환상을 더욱 부추기는 원인 중 하나인 ‘대동아공영권’이라는 구호를 앞세운 일본의 행동은, 일본이 아시아의 일원이 아니라 지배국으로서 아시아에 군림하기를 원하는 국가라는 사실을 명백히 드러냈다.

 

기바타 요이치木畑洋一 2007 <제국 내 인간의 이동과 독립운동> ≪역사: 아시아 만들기와 그 방식≫(사카모토 히로코 외 엮음ㆍ박진우 옮김), 한울, 21∼37쪽.

 

# 기바타 요이치의 살핌처럼 근대 한국의 식민지 해방을 위해 애쓴 이들의 이동을 살필 수 있겠다. 아마도 그 효시는 이위종이 될 듯하고, 여운형을 비롯해 밤하늘 미리내처럼 셀 수 없는 애국지사들과 순국선열들이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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