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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민란의 시기 조선의 지방통치_고석규 Corean Clio

이 시기 향촌질서 변동의 큰 틀은 “전통적인 사족 중심의 성리학적 향촌질서에서 수령-이ㆍ향 주도의 관치 보조적 향촌질서로 변화”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도 여전히 유지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 시기 지방지배 실현 정도를 나타내는 부세운영의 주도권이 국가권력의 직접적 대행자인 수령과 그 예하의 이향들에게 옮겨가고 있었기 때문이다(장동표 <부세정책의 변화와 지방지배> ≪조선은 지방을 어떻게 지배했는가≫, 아카넷, 309∼335쪽). 더욱이 이 시기 성장하고 있는 지방의 새로운 세력을 국가적인 차원이나 향촌사회에서나 제도적으로 포용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지 못하고, 국왕ㆍ집권세력ㆍ지방수령의 개별적이고 사적인 차원에서 이용되고 동원될 뿐이며, 또한 일시적이었기 때문에 19세기 민란의 시기에 기존세력과 크게 다를 바 없었더라도 새로운 이데올로기와 민중적 기반에 주목하게 된다(정진영 2000 <국가의 지방지배와 새로운 세력> 윗 책, 283∼308쪽).

이 시기 농민들의 항쟁으로 인하여 체제의 위기를 맞은 당시 지배세력들은 전통적 향촌질서의 운영원리였던 향약을 적절히 변형시켜 자신들의 이해를 실현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한편 이 향약과 짝을 이루면서 향촌통제의 또 다른 수단이 된 것은 오가작통제였다. 오가작통제는 고종조에 들어오면, 이미 그 조직원리가 “반상을 구분하지 않는다(無論班常)”고 하여 신분제적 원리를 부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시행은 사족들의 성리학적 지배질서의 재건과는 거리가 멀고 오직 국가의 지방통제장치로서만 기능하고 있었다. 곧, 치안 유지 차원에서의 조직일 뿐이었다.

한편, ‘반봉건’의 기치를 내건 농민군의 집강소 설치와 운영은 농민적 향권의 구체적 실현이었고, 그 실현태로 나타난 것이 농민적 향촌질서였다. 여기서 농민적 향권이란 사족들의 가부장적 공동체 내의 자치와는 성격이 현저히 달리하는 것으로 민권자치(民權自治)를 의미한다. 1862년 농민항쟁 단계에서 나타난 ‘농민적 향회(農民的 鄕會)’는 민회(民會)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올라서서 점차 그 조직역량을 키워갔고, 1894년 농민전쟁에서 집강소란 형태까지 상승했다. 이처럼 집강소는 저항조직으로서의 향회가 발전하여 민회단계를 거쳐 농민적 향권의 구현체로서 나타났다. 그런데 집강소는 관에 대립적이거나 배타적인 권력기구는 아니었다. 신분적 굴레를 벗어 버린 질서, 사회적 평등을 실현한 질서, 그것은 곧 농민적 향촌질서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자 사족지배체제나 봉건 모순을 심화시켜 가던 수령-이ㆍ향 주도의 관치보조적 지방지배에 대한 부정이었다.

그리하여 개화파 인사들은 토지소유 또는 재산소유를 기준으로 하는 중소지주 이상의 지주ㆍ부요층이 중심이 되는 참정권의 확대와 지방자치제 실시를 주장하였고, 대한제국기에 들어서면, 자주적ㆍ점진적 개화 개혁론에 상응하여 군주권의 절대성을 전제로 군주와 농민의 직접적인 연계를 통해 지주층을 견제하고 농민층의 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려는 황제권 중심의 국가 지방지배 수준을 높이고자 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 시기 민권의 성장은 특히 봉건적 신분제를 부정하는 평등주의의 실현이라는 점에서 우리나라 지방지배의 근대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어야만 했다.

 

고석규 2000 <19세기 후반 국가의 지방지배> ≪조선은 지방을 어떻게 지배했는가≫, 아카넷, 336∼3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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