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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말 유구열도를 여행하다_윤이시마 백두산 이야기

제주(濟州) 사람 김비의(金非衣)ㆍ강무(姜茂)ㆍ이정(李正) 등 세 사람이 진상선을 타고 풍랑을 만나 표류하여 유구와 일본에서 지내다가 돌아왔는데, 그들이 지낸 유구와 일본 여러 섬의 풍속(風俗)을 말하는 것이 매우 기이(奇異)했다고 하네요. 그래서 성종은 홍문관(弘文館)에 명하여 이들이 겪고 본 이야기를 기록하라고 하네요(≪성종강정대왕실록成宗康靖大王實錄≫105, 성종 10년(1479) 6월 10일(을미)에 홍문관이 기록함). 이들 가운데에는 유구어와 일본어, 또는 한자 필담을 할 줄 아는 이가 있던 모양이어요(거꾸로 그곳에 조선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있을 가능성도 생각해보았지만, 유구국 본토를 제외하고는 가능성이 낮지요). 그래서 앞서 살핀 비슷한 시기의 15세기 중엽 표류견문기(http://coreai84.egloos.com/10636691; http://coreai84.egloos.com/10636264; http://coreai84.egloos.com/10636266)에 비하여 상세한 기록으로 남아 있어요.

이들은 윤이시마(閏伊是麿)ㆍ소내시마(所乃是麿)ㆍ포월로마이시마(捕月老麻伊是麿)ㆍ포라이시마(捕剌伊是麿)ㆍ훌윤시마(欻尹是麿)ㆍ타라마시마(他羅馬是麿)ㆍ이라부시마(伊羅夫是麿)ㆍ멱고시마(覓高是麿) 등과 유구국을 거쳐 조선으로 돌아오면서 살마주(薩摩州)ㆍ식가(軾駕)ㆍ일기도ㆍ쓰시마 섬 등을 거치게 되어요. 그러면 먼저 이들이 표류하여 처음 육지에 오른 윤이시마에 대한 기록을 올리도록 할게요. 윤이시마는 오늘날 류큐열도의 가장 남서쪽 야에야마 제도(八重山諸島) 가운데 한 섬인 요나구니 섬(與那國島)일 가능성이 있지만, 단정 짓기가 어렵네요.

 

우리들이 정유년(丁酉年: 1477 성종 8) 2월 1일에 현세수(玄世修)ㆍ김득산(金得山)ㆍ이청민(李淸敏)ㆍ양성돌(梁成突)ㆍ조귀봉(曹貴奉)과 함께 진상(進上)할 감자(柑子)를 배수(陪受)하여 같이 한 배에 타고 바다로 출범(出帆)하여 추자도(楸子島)로 향해 가다가, 갑자기 크게 불어오는 동풍(東風 : 샛바람)을 만나 서쪽으로 향하여 표류하였습니다.

처음 출발한 날로부터 제6일에 이르러서는 바닷물이 맑고 푸르다가, 제7일부터 제8일까지 1주야(晝夜)를 가니 혼탁(渾濁)하기가 뜨물과 같았으며, 제9일에 또 서풍(西風 : 하늬바람 또는 갈바람)을 만나서 남쪽을 향하여 표류해 가니 바닷물이 맑고 푸르렀습니다. 제14일 째에 한 작은 섬을 바라보게 되었는데, 미처 기슭에 대이지 못하여 키가 부러지고 배가 파손되어 남은 사람은 모두 다 물에 빠져 죽고, 여러 가지 장비도 모두 물에 빠져 잃어버렸으며, 우리들 세 사람은 한 판자에 타고 앉아 있었습니다. 표탕(漂蕩)하는 사이에 마침 고기잡이배 두 척이 있어서 각각 네 사람이 타고 앉아 있다가 우리들을 발견하고는 거두어 싣고 가서 섬 기슭에 이르렀습니다.

섬의 이름은 윤이시마(閏伊是麿)라고<그곳 풍속에 섬을 일컬어 시마라고 한다.> 하였습니다. 인가(人家)가 섬을 둘러 살고 있고, 둘레는 이틀 길이 될 듯하며, 섬사람은 남녀 1백여 명으로 풀을 베어 바닷가에 여막을 만들어서 우리들을 머물게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제주를 출발한 때로부터 큰 바람이 너울을 일으켜 파도가 이마 위를 지나고, 물이 배 가운데 꽉 차서 뱃전이 잠기지 않은 것은 두어 판자뿐이었습니다. 김비의와 이정이 바가지를 가지고 물을 퍼내고, 강무는 노(櫓)를 잡았으며, 나머지는 모두 다 뱃멀미를 하여 누워 있어서 밥을 지을 수가 없어 한 방울의 물도 입에 넣지 못한지가 무릇 열나흘이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섬사람이 쌀죽[稻米粥]과 마늘을 가지고 와서 먹였습니다. 그날 저녁부터는 처음으로 쌀밥 과 탁주(濁酒)와 마른 바닷물고기를 먹었는데, 물고기 이름은 다 알지 못했습니다. 7일을 머문 뒤에 인가에 옮겨 두고서 차례로 돌려가며 대접을 하는데, 한 마을에서 대접이 끝나면 문득 다음 동네로 체송(遞送)하였습니다. 한 달 뒤에는 우리들을 세 마을에 나누어 두고 역시 차례로 돌려가며 대접하는데, 무릇 술과 밥은 하루에 세끼였으며, 온 섬사람의 용모(容貌)는 우리나라와 같았습니다.

 

 

△ 야에야마 제도(八重山諸島)의 요나구니 섬

http://www.pref.okinawa.jp/summit/jp/a_la/map/index_oki_r.htm에서 얻음

 

1. 그 나라 풍속은 귀를 뚫어 푸르고 작은 구슬로써 꿰어 2, 3촌쯤 드리우고, 또 구슬을 꿰어 목에 3, 4겹을 둘러서 1자[尺]쯤 드리웠으며, 남녀(男女)가 같이 하는데 늙은 자는 안했습니다.

1. 남자ㆍ여자 모두 다 맨발로 신이 없었습니다.

1. 남자는 머리를 꼬아 곱쳐서 포개어 삼베 끈으로 묶어서 목 가에 상투를 틀었는데 망건(網巾)을 쓰지 않았습니다. 수염은 길어서 배꼽을 지나갈 정도인데, 혹은 꼬아서 상투를 두어 겹을 둘렀습니다. 부인(婦人)의 머리도 길어서 서면 발뒤꿈치까지 미치고 짧은 것은 무릎에 이르는데, 쪽을 찌지 않고 머리 위에 둘렀으며, 옆으로 나무빗을 귀밑머리에 꽂았습니다.

1. 가마ㆍ솥ㆍ숟가락ㆍ젓가락ㆍ소반ㆍ밥그릇ㆍ자기(磁器)ㆍ와기(瓦器)는 없고, 흙을 뭉쳐서 솥을 만들어 햇볕에 쪼여 말려서 짚불로써 태워 밥을 짓는데, 5, 6일이면 문득 깨져 버립니다.

1. 오로지 쌀만 쓰고, 비록 조(粟)가 있더라도 심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였습니다.

1. 밥은 대나무 상자에 담아서 손으로 뭉쳐 덩어리를 만들되 주먹 크기와 같이 하고, 밥상은 없고 작은 나무 궤(几)를 사용하여 각각 사람 앞에 놓습니다. 매양 밥을 먹을 때에는 한 부인이 상자를 맡아서 이를 나누어 주며 사람마다 한 덩어리씩인데, 먼저 나뭇잎을 손바닥 가운데 놓고 밥덩이를 그 나뭇잎 위에 얹어 놓고 먹으며, 그 나뭇잎은 연꽃잎과 같았습니다. 한 덩어리를 다 먹으면 또 한 덩어리를 나누어 주어 세 덩어리로 한도를 삼으나, 먹을 수 있는 자에게 덩어리 수를 계산하지 않고 다 먹는 데에 따라 주었습니다.

1. 염장(鹽醬)은 없고, 바닷물에 채소를 넣어서 국을 만들며, 그릇은 바가지[瓠子]를 사용하거나 혹은 나무를 파서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1. 술은 탁주는 있으나 청주(淸酒)는 없는데, 쌀을 물에 불려서 여자로 하여금 씹게 하여 죽같이 만들어 나무통에서 빚으며, 누룩을 사용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많이 마신 연후에야 조금 취하고, 술잔을 바가지를 사용하며, 무릇 마실 때에는 사람이 한 개의 바가지를 가지고 마시기도 하고 그치기도 하는데, 양(量)에 따라 마시며 수작(酬酢)의 예가 없고, 마실 수 있는 자에게는 더 첨가합니다. 그 술은 매우 담담하며, 빚은 뒤 3, 4일이면 익고 오래 되면 쉬어서 쓰지 못하며, 나물 한가지로 안주를 하는데, 혹 마른 물고기를 쓰기도 하고, 혹은 신선한 물고기를 잘게 끊어서 회(膾)를 만들고 마늘과 나물을 더하기도 합니다.

1. 혹 쌀을 불려 보구(步臼 : 디딜방아)에 찧어서 이를 뭉쳐 떡을 만들되 종려나무 잎의 크기와 같이 하고, 종려나무 잎으로 싸고 짚으로 묶어서 삶아 먹습니다.

1. 그 거처는 모두 1실(室)을 만들고, 내실(內室)이 따로 없고 창[戶牖]이 없으며, 앞은 조금 높이 들려 있고, 뒤는 처마가 땅에 드리워져 있으며, 대개 띠[茅]를 사용하고 기와가 없으며, 밖에는 울타리가 없고 잠자리는 목상(木床)을 사용하며, 이불과 요가 없고 포석(蒲席)을 깔아서 사용하며, 사는 집 앞에 따로 누고(樓庫)를 만들어 거둔 바의 벼를 쌓아 두었습니다.

1. 관대(冠帶)가 없고 더우면 혹 종려나무 잎을 사용하여 삿갓 모양의 것을 만들었는데, 우리나라 승립(僧笠)과 같았습니다.

1. 삼[麻]ㆍ목면(木綿)이 없고, 양잠(養蠶)도 하지 않았으며, 오직 모시[苧]를 짜서 베를 만들고, 옷을 만들되 직령(直領)과 같았으며 옷깃과 주름은 없고 소매는 짧고 넓으며, 염색(染色)은 남청(藍靑)을 쓰고, 속옷은 백포(白布) 세 폭을 써서 볼기[臀]에 매었으며, 부인의 옷도 같았으나, 다만 속치마를 입고 속옷이 없으며 치마도 푸른빛을 물들였습니다.

1. 집에는 쥐ㆍ소ㆍ닭ㆍ고양이가 있으나, 소와 닭의 고기를 먹지 않고 죽으면 곧 묻었습니다. 우리들이 이르기를, ‘소ㆍ닭의 고기는 먹을 만한데 묻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하였더니, 섬사람들은 침을 뱉으면서 비웃었습니다.

1. 산에는 재목(材木)이 많고, 잡수(雜獸)가 없었습니다.

1. 날짐승으로는 오직 비둘기와 황작(黃雀)뿐이었습니다.

1. 곤충(昆蟲)으로는 거북ㆍ뱀ㆍ두꺼비ㆍ개구리ㆍ모기ㆍ파리ㆍ박쥐ㆍ벌ㆍ나비ㆍ사마귀[螳蜋]ㆍ잠자리ㆍ지네[蜈蚣]ㆍ지렁이ㆍ개똥벌레[螢]ㆍ게가 있었습니다.

1. 철야(鐵冶)는 있으면서도 쟁기[耒耜]를 만들지 않고 작은 삽을 사용하여 밭을 파헤치고 풀을 제거하여 조[粟]를 심습니다. 수전(水田)은 12월 사이에 소를 사용하여 밟아서 파종(播種)을 하고, 정월 사이에 이앙(移秧)을 하되 풀을 베지 않으며, 2월에 벼가 바야흐로 무성하여 높이가 한 자쯤 되고, 4월에 무르익는데, 올벼[早稻]는 4월에 수확을 마치고 늦벼[晩稻]는 5월에 바야흐로 추수를 마칩니다. 벤 뒤에는 뿌리에서 다시 자라나 처음보다 더 무성하며, 7∼8월에 수확합니다. 수확기 전에는 사람들이 모두 근신(謹愼)하여, 비록 말을 하더라도 소리를 크게 하지 아니하고, 입을 오므려 휘파람을 불지 아니하며, 혹 풀잎을 말아서 불면 막대기로 이를 금하다가, 수확을 한 뒤에야 작은 피리[管]를 부는데, 소리가 매우 가늘었습니다. 한번 수확한 벼는 이삭을 연달아 묶어서 누고(樓庫)에 두고, 대나무 막대기로 이를 털어서 디딜방아로 찧습니다.

1. 풀과 벼를 베는 데에는 낫[鎌]을 쓰고, 쪼개거나 찍는 데에는 도끼와 무자(䥈子)를 사용하며, 또 작은 칼이 있고, 궁시(弓矢)와 부극(斧戟 : 도끼와 창)은 없으며, 사람들은 작은 창(鎗)을 가지고 기거(起居)하며 놓지를 아니하였습니다.

1. 사람이 죽으면 관(棺) 속에 앉혀서 언덕의 석굴[厂] 밑에 두고 흙으로 묻지 않았으며, 만약 언덕의 석굴이 넓으면 대여섯 개의 관을 함께 두었습니다.

1. 그 지역은 따뜻하여 겨울에도 서리와 눈이 없고 풀과 나무가 마르지 아니하며 또 얼음이 없습니다. 섬사람들은 홑옷 두 벌을 입고 여름에는 다만 하나를 입는데 남녀가 같았습니다.

1. 채소로는 마늘ㆍ가지ㆍ참외ㆍ토란[母鴟]ㆍ생강이 있는데, 가지의 줄기 높이가 3, 4척이나 되고 한 번 심으면 자손(子孫)에게까지 전하는데 결실(結實)은 처음과 같고, 너무 늙으면 가운데를 찍어 버리나 또 움이 나서 열매를 맺었습니다.

1. 나무는 오매(烏梅)ㆍ뽕나무ㆍ대나무가 있었습니다.

1. 과실로는 청귤(靑橘)ㆍ작은 밤[栗]이 있는데, 귤은 사시(四時)로 꽃이 피었습니다.

1. 등촉(燈燭)이 없고, 밤이면 대[竹]를 묶어서 횃불을 만들어 비추었습니다.

1. 집에는 뒷간[溷廁]이 없고 들에다 그냥 눕니다.

1. 베를 짤 때에는 성서(筬抒 : 바디, 베틀에 달린 날을 고르는 제구.)를 사용하는데 모양은 우리나라와 같았고, 그 밖에 다른 기계는 같지 않았으며, 승수(升數 : 새수)와 추세(麤細 : 굵고 가늚)도 우리나라와 같았습니다.

1. 땅을 파서 작은 우물을 만들고 물을 길을 때에는 바가지와 병을 썼습니다.

1. 배는 키와 돛대만 있고 노(櫓)는 없는데 순풍(順風)에만 돛을 달 뿐이었습니다.

1. 그 풍속에 도적이 없어서 길에서 떨어진 것을 줍지 아니하고, 서로 꾸짖거나 큰 소리로 싸우지 아니하며, 어린아이를 어루만져 사랑하여 비록 울더라도 손을 대지 아니하였습니다.

1. 풍속에 추장(酋長)이 없고, 문자(文字)를 알지 못했으며, 우리들은 저들과 언어가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 땅에 있으니, 조금은 그 말하는 바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고향을 생각하고 항상 울었는데, 그 섬사람이 새 벼의 줄기를 뽑아서 옛날 벼와 비교해 보이고는 동쪽을 향하여 불었는데, 그 뜻은 대개 새 벼가 옛 벼와 같이 익으면 마땅히 출발하여 돌아가게 되리라는 것을 말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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