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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여성 사관의 존재 세엣 Corean Clio

그럼에도 이와 같은 적극적 해석을 머뭇거리게 하는 구절이 너무 이른 시기의 자료부터 눈에 띠고 있다.

 

㉯-1. 내사(內史) 전가화(田嘉禾)와 해수(海壽) 등이 정씨(鄭氏)를 데리고 경사(京師)로 돌아갔는데, 그 아비 전(前) 지의주사(知宜州事) 정윤후(鄭允厚), 소환(小宦) 2인, 여사(女史) 4인이 따라갔다(≪태종실록≫20, 태종 10년(1410) 10월 28일).

 

㉯-2. 여사(女史) 1인은 구(鉤)를 잡고, 1인은 광(筐)을 잡는다……. 처음에 왕비가 뽕을 채취하면, 여사가 각각 갈고리를 마땅히 채상할 내명부ㆍ외명부에게 주고, 왕비가 뽕을 채취하기를 마치면, 전빈(典賓)이 내명부ㆍ외명부를 인도하여 차례로 뽕을 채취하고, 집광자가 이를 받는데, 내ㆍ외명부 1품은 각각 일곱 가지를 채취하고, 2, 3품은 각각 아홉 가지를 채취한다. 여사가 갈고리를 받아 집광자와 더불어 물러나 제자리로 돌아오고, 전빈이 각각 내명부ㆍ외명부를 인도하여 제자리로 돌아온다. 상의(尙儀)가 왕비 앞에 나아가 부복하고 꿇어앉아 ‘예(禮)가 끝났다.’고 아뢰면, 음악이 연주된다. 상궁이 왕비를 인도하여 남쪽 계단으로 내려와 악차로 돌아온다(≪성종실록≫77, 성종 8년(1477) 윤2월 27일, 친잠의 의식).

 

㉯-3.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것 같으나 다수로 정하면 이는 여악(女樂)과 같습니다. 이는 한 달에 닭 한 마리씩 훔친다는 설과 같은 것이며, 또 늙은 기생 몇 사람으로 지휘하게 하면 이는 여사(女史)의 유와 같은 것입니다(≪중종실록≫35, 중종 14년(1519) 3월 1일).

 

㉯-1은 실록에 보이는 ‘여사’의 첫 기록인데, 이것이 여성 사관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또한, ㉯-2에 보이는 상의(尙儀)는 앞서 언급한 "예의(禮儀)와 기거(起居)를 맡고, 사빈(司賓)과 전찬(典贊)을 통솔을 맡은" 임무를 수행하는 그 이상의 여성 사관의 모습을 그려내기가 어렵다. 그리고 ㉯-3의 “한 달에 닭 한 마리씩 훔친다.”는 이야기는 잘못된 일임을 알게 되었으면 빨리 고치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곧, ≪맹자(孟子)≫ 등문공 하(滕文公 下)에 “어떤 사람이 자기 집으로 오는 이웃집 닭을 날마다 잡아먹는데, 옆의 사람이 ‘이는 군자의 도리가 아니다.’ 하니, 대답하기를 ‘그럼 줄여서 한 달에 한 마리씩 잡아먹다가 내년에 가서 그만두겠다.’ 했다.” 하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당시 조강에서 대사헌(大司憲) 조광조(趙光祖)와 정언(正言) 양팽손(梁彭孫)이 ‘여악의 철폐’를 간곡히 진달하는 과정에서 조광조가 지적한 내용인데, 중종의 “전에 의논한 바를 들으니 40∼50세 된 여자를 다수(多數) 예정(豫定)하였다 하는데, 과연 젊고 예쁜 여자로 하게 되면 도리어 폐가 있게 된다.”고 하는 의견을 은근하게 비판한 내용이다. 그럼에도 여기서 보이는 ‘여사’는 ㉯-1과 2의 ‘여사’처럼 오늘날 여성 보좌관 또는 여성 기술관 정도로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 ≪연산군일기≫에 놀랄 만한 기록이 보이고 있다.

 

㉰ 궁인(宮人)들이 문자를 알지 못하므로 비록 서책을 가져오도록 하여도 제목조차 알지 못하니 자못 뜻에 맞지 않는다. 듣건대 옛날에는 여사(女史)들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다만 궁중의 예의범절은 글을 알아 의주(儀註)를 읽을 수 있는 자가 아니면 집례(執禮)를 할 수 없으니, 반드시 나이가 젊고 영리한 계집을 뽑아 들여 학습시켜야겠다(≪연산군일기≫56, 연산 10년(1504) 11월 24일).

 

조선시대 여성에게 ‘문자(文字)’라고 인식된 한자를 배우거나 아는 일은 금기에 가까웠는데, 연산군은 ‘여사(女史)’의 역사적 존재를 근거로 하여 궁중의 예의범절은 글 알아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나이가 젊고 영리한 계집을 뽑아 들여 학습시켜야겠다.”고 다짐에 가까운 공언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과연 이들을 여성 사관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오히려 원문에서 드러나듯이 ‘궁중의 예의범절’과 관련한 여성 관원일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여성 사관을 뜻하는 '여사'의 임무와 비슷한 역할을 '문자 해득'과 '궁중의 예의범절'을 연관시켜 이를 표면에 올리고자 한 연산군의 노력은 얼마 지나지 않아 관료들에 의해 폐주가 된 뒤, 이와 같은 논의는 물밑으로 가라앉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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