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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여성 사관의 존재 두울 Corean Clio

그러면 이제 조선왕조실록 누리집과 한국고전번역원 누리집에서 여성 사관을 뜻하는 ‘여사(女史)’와 그들이 쓴 붉은 빛깔 붓인 ‘동관(彤管)’을 주요 검색어로 삼아 여성 사관의 존재 가능성을 좇아가 보도록 하겠다.

 

㉮-1. 공손히 생각하건대, 우리 성모께서는 부드러운 곤(坤)의 바탕을 타고나셨고, 아름다운 자태를 가졌었다. 일찍이 장추궁(長秋宮)에 위(位)를 바르게 하여 선왕(先王)의 배필이 되었다. 고요한 덕은 본래 동관(彤管)의 시(詩)에 의거하였고, 예(禮)로써 스스로 행하는 것은 또 명현(明賢)의 송(頌)에 합하였다. 갈담(葛覃)의 몸소 검소하는 아름다움이 있었고, 권이(卷耳)의 사사로운 마음이 없었다. 덕화는 육궁(六宮)에 입혀졌고, 풍교(風敎)는 사해에 행하여졌다. 비록 도산(塗山)의 도(道)가 하(夏) 나라를 돕는 데 빛나고, 화희(和憙)의 뜻이 유씨(劉氏)를 편안히 하는데 있었으나, 우리 성모께서는 공업의 높은 풍도가 홀로 아름다웠다(최유청 <왕태후 옥책문> ≪동문선≫28).

 

㉮-2. 예절로 행동하여 여사(女史)의 경계함을 따르려 하나이다(이규보 <왕비 수책후 사 태후 표> ≪동문선≫37).

 

㉮-3. 녹의(綠衣)의 풍자는 당시에 일지 않았고, 동관(彤管)의 글은 세상에서 족히 신임을 받으리라(이제현 <왕 순비 허씨 묘지명> ≪동문선≫124).

 

고려 시기부터 보이고 있는 ‘여사’와 ‘동관’의 표현은 주로 왕비와 관련한 글 가운데 많이 나타나고 있다. 곧, 중국의 전승처럼 고려에서도 왕후의 언행과 정령에 관한 일과 관련하여 ‘여사’ 또는 ‘동관’과 연관을 시켰지만, 이것이 곧 ‘여성 사관’의 존재를 뜻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조선 시기 이와 비슷한 문구가 대한제국 말기까지 엄연하였기 때문이다. 다음은 바로 그러한 사례들이다.

 

㉮-4. 평소의 행실을 동관(彤管)에서 살펴보니 내칙(內則)이 여기에 있습니다(≪인조실록≫27, 인조 10년(1632) 9월 5일, 인목대비 시책문).

 

㉮-5. 자의 대왕 대비(慈懿大王大妃)에게 ‘공신(恭愼)’이란 존호를 더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자의 대왕 대비 전하께서는 도(道)가 중화에 합치되고 덕(德)이 여사(女史)에 밝게 드러났다(≪현종개수실록≫6, 현종 2년(1661) 7월 27일).

 

㉮-6. 비록 음용(音容)이 이미 닫혔다 하더라도, 동관(彤管)의 기록이 있으니, 거의 행적(行跡)을 징험(徵驗)할 수 있을 것이다(≪숙종실록≫11, 숙종 7년(1681) 2월 17일, 인경 왕후 시책문).

 

㉮-7. 정안 왕후(定安王后)께서는 타고난 자질이 유순하고 마음가짐이 깊고 성실하셨으며, 아랫사람에 대한 인애는 일마다 여사(女史)에 빛나며, 지아비 받들기를 유순하게 하여 도리가 황상(黃裳)에 적합하였습니다(≪숙종실록≫12, 숙종 7년(1681) 12월 7일, 정안 왕후 옥책문).

 

㉮-8. 꽃다운 공렬(功烈)은 오래 남아서 오히려 동관(彤管)에 밝혀져 있습니다. 아! 슬픕니다. 삼가 아룁니다(≪숙종실록≫15, 숙종 10년(1684) 3월 27일, 명성 왕후(明聖王后) 시책문).

 

㉮-9. 은택에 길이 사모하는 마음을 붙이고 따뜻한 보호에 길이 슬퍼하는 마음을 맺어, 여사(女史)에게 명하여 덕(德)을 찬술하게 하고 옥책(玉冊)에 실어서 아름다움을 찬양하니, 그 사(詞)는 이러합니다(≪숙종실록≫15, 숙종 10년(1684) 4월 3일, 명성 왕후 애책문).

 

㉮-10. 양휘(揚徽)할 것을 생각하여 후인에게 명령하고 동관(彤管)을 명하여 일을 기록하시니, 그 사(詞)에 이르기를 ‘생각건대 화벌(華閥)은 선계(先系)가 한양(漢陽)에서 나왔는데 사록(沙麓)의 이상한 징조로 월홍(月虹)의 상서로운 꿈을 꾸어 성스러운 몸이 향실(香室)에서 탄생하였는데, 천계(天啓)옥책(玉冊)을 열었으며, 조용하고 공손하며 깊은 심성은 일찍부터 착한 덕을 드러내었습니다(≪숙종실록≫19, 숙종 14년(1688) 12월 16일).

 

㉮-11. 아! 동관(彤管)의 천추(千秋)에 이미 상성(相成)의 아름다움을 적었으니, 청구(靑丘)의 팔역(八域)에서 영태(永泰)의 기약을 볼 것이다(≪숙종실록≫22, 숙종 16년(1690) 1월 22일, 희빈 장씨(張氏)를 책봉한 뒤 팔방에 교서(敎書)를 반포하여 사유(赦宥)한 글).

 

㉮-12. 동사(彤史)에 아름다움이 전해짐은 비록 2백 년이 지났으나 징험할 수 있으며, 요도(瑤圖)에 경사가 넘침은 천만 년이 되도록 쇠하지 않을 것입니다(≪숙종실록≫32, 숙종 24년(1698) 12월 25일, 정순 왕후 애책문).

 

㉮-13. 동관(彤管)이 전하는 성적(聲績)으로 그 행실을 길이 징빙(徵憑)하여 영구히 전하기에 족하리로다(≪숙종실록≫35, 숙종 27년(1701) 11월 28일, 인현 왕후 시책문).

 

㉮-14. 삼가 바라건대 왕후 전하께서는 숙령(淑靈)을 돌리시어 굽어 흠윤(歆允)을 내리셔서, 동사(彤史)에 꽃다운 이름을 남겨 길이 백대(百代)에 성덕(盛德)을 전하시고, 요도(瑤圖)에 경사를 펼치시어 오히려 이남(二南)의 풍화(風化)를 힘입게 하소서(≪숙종실록≫53, 숙종 39년(1713) 3월 9일, 인현 왕후 추존 책문).

 

㉮-15. 우리 성후(聖后)의 철범 혜문(喆範惠聞)은 비록 동사(彤史)에 기록된 어떤 일도 이보다 나을 것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는 마땅히 하늘의 도움을 받아 복록을 향유하여야 할 터인데, 돌아보건대, 경자년 이후로 10여 년 간에 국운(國運)이 망극하여 상변(喪變)이 거듭 일어났는데, 후(后)는 이에 눈물로써 날을 보냈으므로 슬픔이 쌓여 화병이 생겨 수(壽)까지 오래 누리지 못하게 되니, 천리(天理)를 믿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도다(≪영조실록≫27, 영조 6년(1730) 8월 27일, 경종 계비 경순 왕후 묘지문).

 

㉮-16. 처음에 왕비와 채상 여사(採桑女史)가 각기 갈고리를 혜빈ㆍ왕세손빈 및 채상하는 내ㆍ외 명부에게 준다. 왕비가 뽕따는 것을 마치면 전빈이 혜빈ㆍ왕세손빈, 내ㆍ외 명부를 인도하여 차례로 뽕을 따면, 광주리를 잡은 자가 받는다. 혜빈ㆍ왕세손빈이 각기 일곱 가지를 따고 내ㆍ외 명부가 각기 아홉 가지를 따면, 여사(女史)는 갈고리를 받아 광주리를 잡은 자에게 주고 물러가 제자리로 돌아가고, 전빈은 혜빈ㆍ왕세손빈, 내ㆍ외 명부를 인도하여 제자리로 돌아간다(≪영조실록≫108, 영조 43년(1767) 3월 10일, 왕비가 선잠에 작헌하는 의식의 절차).

 

㉮-17. 전하께서는 현실(玄室)의 지문(誌文) 서술을 신에게 명하셨는데, 빈께서는 항상 말씀하시기를 ‘부녀자가 무슨 지장(誌狀)이 필요하겠는가? 내가 죽은 뒤에는 행록(行錄)을 짓지 말라.’라고 하셨기 때문에 일상생활 속에서 여사(女史)를 빛내고 사책(史策)에 빛나게 할 만한 일을 상세히 상고할 길이 없게 되었다(≪순조실록≫26, 순조 23년(1823) 2월 3일, 휘경원 지문).

 

㉮-18. 비의 순정하고 효성스러운 행실과 아름다운 말과 훌륭한 계책은 여인들의 본보기로 내세울 만한 것들이건만 여사(女史)가 쓴 것과 본 것에서 적어 들여온 것은 겨우 열 중의 한둘밖에 안된다(≪고종실록≫45, 고종 42년(1905) 1월 4일, 순명비(純明妃) 민씨(閔氏) 묘지문).

 

이렇게 ‘여사’와 ‘동관’은 조선을 이은 대한제국 시기까지 왕후와 관련한 여러 글들에서 끊이지 않고 나타나는데, 이는 실제 여성 사관의 존재를 알려주는 내용이라기보다는 왕후와 관련한 미사여구(美辭麗句)에 가까운 인용 문구라는 느낌만 들뿐이다. 곧, 여전히 남는 문제는 바로 이들의 존재가 곧바로 ‘여성 사관’의 존재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편, ㉮-16의 <왕비가 선잠에 작헌하는 의식의 절차>에서 언급된 ‘여사’는 여성 사관이 아닌 일반 여성 관원이라 여겨진다.

그럼에도 이 가운데 ㉮-6 의 <인경 왕후 시책문>, ㉮-10, ㉮-17의 <휘경원 지문>의 내용과 ㉮-18의 <순명비 민씨 묘지문>의 내용은 마치 ‘여성 사관’이 존재하고 있음을 비추고 있다. 그래서 이들의 내용을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앞서 언급한 상의(尙儀)ㆍ사기(司記, ≪대전회통≫에서는 상기(尙記)로 되어있다.)ㆍ전언(典言)들을 여성 사관에 준하는 여사 또는 동관의 역할을 담당한 여성 관원으로 이해하면 어떨까. 그리고 바로 이들이 정리한 기록들이 ‘동관의 사’, ‘여사의 기록’, ‘동관이 전하는 기록’, ‘동사’ 따위로 전승되었다고 여기면 어떨까. 왜냐하면, 이들은 조선 왕조 최후의 법전인 ≪대전회통≫에서도 존재하는 여성 관원이기 때문이다.

 

△ ≪대전회통≫ 내명부_국립중앙도서관 전자도서관에서 얻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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