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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여성 사관의 존재 하나 Corean Clio

조선 사회는 남녀가 유별한 사회였다. 그래서 남성 관리가 있는 동시에 여성 관리도 존재하였다. 내명부 여관을 살피면서 1428년(세종 10)에 정한 <조선 초기 내명부 관직명과 하는 일(http://coreai84.egloos.com/10480221)>을 정리하다가 여성 사관(史官)의 존재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다. 이러한 생각의 바탕이 된 것은,

 

예의(禮儀)와 기거(起居)를 맡고, 사빈(司賓)과 전찬(典贊)을 통솔을 맡은 정5품 상의(尙儀)

궁내(宮內) 문부(文簿)의 출입을 맡은 정6품 사기(司記)

선전(宣傳)과 계품(啓稟)을 맡은 정7품 전언(典言)

 

의 존재에서 비롯하였다. 기거를 맡고, 문부를 다루며, 선전과 계품을 맡은 여성 관인의 존재는 여성 사관의 존재 가능성을 충분히 가늠하게 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빈(嬪)과 귀인(貴人)의 임무가 내명부 최고 지위자인 왕비와 함께 ‘비(妃)의 보좌를 맡고 부례(婦禮)를 논(論)한다’고 하는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이 논란한 내용을 정리할 여성 관인이 있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논의 과정을 남성 사관이 가서 정리하기란 상상조차 힘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 사관의 존재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로는 여성 사관이 남긴 사초를 만날 수 없고,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여성 사관이 남긴 기록이라고 느낄 만할 내용을 만날 수 없다. 일찍이 조선 중기 문관 장유(張維, 1587~1638)는 선조(宣祖)의 계비(繼妃)이자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친어머니인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애책문(哀冊文)을 지으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다.

 

인목왕후의 상사(喪事)에, 내가 교명(敎命)을 받들고 애책문을 지었는데, 그 글 가운데에 “이에 동관(彤管)에게 명하여 향기로운 자취를 찬양하게 하였다.”는 표현이 들어 있었다. 그러자 김 판서 신국(金判書藎國)이 이것을 보고 나에게 말하였다: “동관(彤管)이라는 것은 바로 여사(女史)가 사용하는 것인 만큼, 여기에다 적용한다면 본래의 뜻을 잃어버릴까 염려된다.” 그런데 내가 기억하기로는, 옛사람들이 역사를 기록할 때의 붓도 동관이라고 하였는데, 다만 어느 책에 나오는지를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의혹을 해소시켜 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우연히 ≪사문류취(事文類聚)≫를 뒤적이다 보니, “사관(史官)이 사실을 기술할 때에는 동관(彤管)을 가지고 기록한다는 말이 ≪고금주(古今注)≫에 나와 있다.”고 하였으므로, 그때에야 비로소 모든 의심이 확연히 풀리었다(<문장을 지을 때 고사를 쓰는 일> ≪계곡만필(谿谷漫筆)≫2).

 

장유는 김신국(1572~1657)이 지적한 ‘동관(彤管)’의 고사를 찾아가는 과정을 좇으면서 의심이 풀렸다고 하였는데, 이 글 또한 그 과정이라고 보면 되겠다. 다만, 장유의 노력에서 동관이 여성 사관이 쓴 붓이라는 고사까지는 좇아가지 못하여 여성 사관의 존재 여부에 대한 지적이 없는 아쉬움이 있다. 아마도 김신국의 “본래의 뜻을 잃어버릴까 염려된다.”는 지적 때문인 듯하다(인목왕후의 애책문은 ≪계곡집≫2, 능지문은 ≪계곡집≫10에 보인다). 한편, 중국의 경우 여성 사관의 존재를 알려주는 기록이 일찍부터 보인다.

 

≪주례(周禮)≫ 천관(天官): “여사는 왕후의 예직을 맡는다. 내치의 다음가는 자리에 있는 왕후를 깨우쳐 내정을 다스리게 한다. 내궁의 일을 맡아 왕후의 명령을 기록하는데, 무릇 왕후의 일을 왕의 예에 준하여 따른다(女史掌王后之禮職, 掌内治之貳, 以詔后治内政。 逆內宮, 書內令, 凡后之事以禮從。).”

 

≪시경(詩經)≫ 패풍(邶風) 정녀(靜女): “나에게 동관을 주다(貽我彤管).” 하였고, 그 주에, “옛적에는 왕후 부인에게 반드시 여사가 동관을 지닌 법이 있는데, 여사가 기록하지 않으면 그 죄로 죽임을 당하였다. 후비와 여러 첩은 예로써 임금의 처소를 드나들었는데, 여사가 그 날짜를 써서 옥고리과 함께 주어 드나들었다. 아이 태어나면 날짜와 시간을 금고리와 함께 주었다. 담당자는 금고리를 하고 왕에게 나아갈 때 왼손에 차고, 이미 찬 경우에는 오른손에 찬다. 일의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모두 기록하는 것을 법으로 삼는다(古者后夫人必有女史彤管之法, 史不記過, 其罪殺之。 后妃群妾以禮禦於君所, 女史書其日月, 授之以環, 以進退之。 生子月辰, 則以金環退之。 當禦者, 以銀環進之, 著於左手; 既禦, 著於右手。 事無大小, 記以成法。).”고 하였고, 또 “반드시 붉은 대롱으로 장식한 것은 여사로 하여금 단심으로 부인을 섬겨서 비첩의 차서를 바르게 하기 위함이다(必以赤者, 欲使女史以赤心正人, 謂赤心事夫人, 而正妃妾之次序也。).”

 

≪후한서(後漢書)≫ 황후기(皇后紀) 서문: “여사가 동관으로 공을 기록하고 허물을 쓴다(女史彤管, 記功書過).”

 

여성 사관으로서의 ‘여사(女史)’라는 직명이 보이고, 그들이 왕후의 언행과 정령을 정리하는 붓의 빛깔이 붉은 까닭에 ‘동관(彤管)’이라고 하였다 한다. 유지기(劉知幾) 또한 이러한 전승을 인정하였다(又按詩ㆍ邶風ㆍ静女之三章, 君子取其彤管。 夫彤管者, 女史記事規誨之所執也。 古者人君, 外朝則有國史, 内朝則有女史, 内之與外, 其任皆同。 ≪史通≫11 外篇 史官建置1). 이러한 전통은 ≪신당서≫ <백관지>에 ‘동사’라는 직명으로 나타나고, 명대 역호(酈琥)가 엮은 ≪동관유편彤管遺編≫ㆍ청대 모기령(毛奇齡)이 지은 ≪승조동사습유기勝朝彤史拾遺記≫로 나타난다.




덧글

  • 스토리작가tory 2010/12/30 17:39 # 답글

    서,성균관 스캔들...
  • 고리아이 2010/12/31 00:26 #

    허걱!
    님의 상상력은 저의 데데함을 뛰어 넘으셨네영
    고맙습니다영^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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