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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중엽 유구국 견문기 두울 백두산 이야기

초득성(肖得誠) 등 8인이 금년(今年: 1462, 세조 8) 정월 24일에 나주(羅州)에서 배를 출발하여 2월 초4일에 표류하다가 유구국 미아괴도(彌阿槐島)에 이르렀다. 섬사람들이 술과 고기를 실어 와서 먹이고 인도하여 이 섬에 머물게 하고서 섬사람들이 차례로 돌아가며 음식을 준비하여 공급하였다. 섬의 길이가 2식(息) 가량, 너비가 1식(息) 정도 되었다. 2월에 보리를 이미 거두어 들였고 밀이 모두 익었으며, 참외와 가지도 또한 이미 열매가 맺혔다. 4월 16일에 이르러 유구국 상선(商船)에 쫓아가 부탁하여 그달 27일에 본국(本國)에 도착하였다. 국왕(國王)이 궁내(宮內)의 남쪽 행랑(行廊)에다 두고 접대하였는데, 날마다 불러 보고 후하게 공궤(供饋)하였다. 7월 6일에 출발하여 돌아왔다.

1. 성(城)은 3겹으로 되었고 모두 석성이었는데 성의 높이는 우리나라의 도성(都城)과 같았으나 약간 높았으며, 성문(城門)도 또한 우리나라와 같았다. 그 성은 구부러져서 마치 곡수(曲水)와 같았는데 두 성의 서로의 거리가 마치 한 필(匹)의 베[布] 길이와 같았다.

1. 국왕은 2층(層)의 전각에 거(居)하였는데, 그 전각은 모두 단청[丹艧]을 입히고 지붕을 판자(板子)로 덮고 취두(鷲頭: 망새)마다 납(鑞)으로써 진하게 칠하였다. 낭무(廊廡)는 주위 둘레에 돌아가면서 연접(連接)하였는데, 그 칸수(間數)를 자세히 알 수가 없었다. 군사들이 머물러 숙위(宿衛)하였는데, 조회(朝會)와 죄수(罪囚)를 국문(鞫問)할 때에 군사들은 갑옷을 입고 시위(侍衛)하였으며, 또 면갑(面甲)을 착용하였는데, 마치 탈 모양과 같았으니, 쇠로써 두 뿔을 만들어 모양이 마치 녹각(鹿角)과 같았고 금(金)·은(銀)으로 진하게 칠하였다. 쇠로써 행등(行滕)을 만들어 그 두 다리를 묶었다.

1. 국왕은 나이가 33세였다.

1. 국왕은 아들 4인이 있었는데, 장자(長子)는 나이가 15세쯤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어리었다. 장자가 출입(出入)할 때에는 군사 10여 인이 모시고 따랐었다. 왕자(王子)들은 국왕과 더불어 같은 곳에 살지 아니하고 따로 다른 곳에서 살았다.

1. 옛 궁궐은 살고 있는 궁성(宮城)의 남쪽에 있는데, 그 층각(層閣)과 성곽(城廓)의 제도가 항상 거처하는 궁궐과 같았다. 때때로 왕래하면서 혹은 2, 3일씩, 혹은 4, 5일씩 머물러 거처하였다. 국왕이 행차할 때에 시위(侍衛)하는 군사는 약 3백여 명이었는데, 모두 갑옷을 입고 말을 탔으며, 잡고 있는 병기(兵器)는 혹은 궁시(弓矢)이거나 혹은 창(槍)이거나 혹은 검(劍)이었고, 혹은 모양이 갈고리[鉤] 같은 것도 있었는데, 전후로 대열(隊列)에 섞여서 행진하였다. 국왕은 혹은 교자(轎子)를 타기도 하고 혹은 말을 타기도 하며, 시위하는 군사들은 노래를 부르는데, 그 곡절(曲節)이 마치 농부가(農夫歌)와 같았다. 국왕의 나이 어린 세 아들은 대열의 앞에 있고, 장자는 대열의 뒤에서 따랐다.

1. 국왕이 한가롭게 거(居)할 때에는 혹은 홍백초(紅白綃)를 사용하거나 혹은 흑초(黑綃)를 사용하여 머리를 싸매지만, 만약 출입(出入)할 때에는 왜립(倭笠) 착용하는데 그 모양이 마치 본국(本國) 여자들의 죽립(竹笠)과 같으며, 안은 붉고 바깥은 검었다. 복식(服飾)은 조관(朝官)과 별 다름이 없었다.

1. 5일마다 한 번씩 조회(朝會)하는데, 좌우에 각각 하나의 대기(大旗)를 세우고 다른 의장(儀仗)은 없었다. 조관(朝官)이 뜰에 들어가 합장(合掌)하여 세 번 절하였다. 그날 인민(人民)들이 술통을 가지고 와서 궁궐에 술을 바치고, 또 생저(生苧)도 바쳤다.

1. 백성들의 거주(居住)가 조밀(稠密)하여 집들이 가까와 담장이 붙었고, 길거리가 매우 좁은데, 인가(人家)에서는 소나무와 종려나무 두 그루를 심기를 좋아하였다.

1. 의복(衣服) 제도는 하나같이 왜복(倭服)과 같았는데, 다만 바지를 입지 않을 뿐이었다. 그 복장은 단자(段子)·사초(紗綃)와 저포(苧布)를 쓰는데, 남녀가 같은 복장이었다.

1. 그 풍속에 항상 크고 작은 칼 두 자루를 차고 다니는데, 음식을 먹고 기거(起居)할 때에도 몸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칼의 모양은 본국(本國)의 환도(環刀)와 같았다.

1. 상하(上下)의 남녀(男女)는 아울러 모두 맨발로 다니며 신발을 신지 않으나, 다만 성(城) 밖에서는 신을 신는데 왜혜(倭鞋)와 같았다. 궁성(宮城)에 들어오면 신지 않으며, 비록 성(城) 밖이라고 하더라도 만약 존장자(尊長者)를 만나면 또한 벗어버렸다.

1. 남자는 상투를 땋아서 머리의 왼쪽으로 두고, 여자는 상투를 땋아서 머릿골 뒤에 두는데, 항상 관건(冠巾)을 쓰지 않지만 비가 오는 날에는 혹은 왜립(倭笠)을 쓰기도 하고, 혹은 종려 잎을 쓰기도 하고, 혹은 전삼(氈衫)을 쓰기도 하고, 혹은 도롱이[蓑衣]를 쓰기도 하였다.

1. 조관(朝官)의 녹봉(祿俸)은 5일마다 한 차례 반사(頒賜)하였다.

1. 외성(外城) 안에 창고(倉庫)와 내구(內廐)가 있는데, 항상 큰 말 6필(匹)을 길렀다.

1. 강(江)가에 성(城)을 쌓고, 그 가운데 주고방(酒庫房)을 설치하여 방 안에 큰 옹기(甕器)를 배열(排列)하고 술들을 가득 채워 놓고서, 1년치, 2년치, 3년치의 주고(酒庫)에 그 정액(定額)을 나누어 써 붙였다. 또 군기고(軍器庫)를 설치하여 철갑(鐵甲)·창(槍)·검(劍)·궁시(弓矢)를 그 가운데에 가득 채워 놓았다.

1. 여러 가지 곡류(穀類)가 모두 있었다.

1. 그 가축(家畜)은 소·말·닭·개가 있었고, 짐승은 노루·사슴이 있었고, 날짐승은 제비·꾀꼬리·까마귀·뻐꾸기·참새가 있었으나, 호랑이와 표범은 없었다.

1. 그 채소(菜蔬)는 파·부추·마늘·생강·무우·상치·파초(芭蕉)·양하(蘘荷)·토란·마[薯藇]가 있었다.

1. 선척(船隻)은 항상 벌레가 먹을까 염려하여 강(江) 가에 초사(草舍)를 지어서 들여놓았다.

1. 저자[市]는 강(江) 가에 있었는데, 남만(南蠻)·일본국·중국의 상선(商船)이 와서 서로 교역하였다.

1. 남만은 나라의 정남쪽에 있는데, 순풍(順風)이면 3개월 만에 도착할 수 있고, 일본국은 나라의 동남쪽에 있는데 5일 만에 도착할 수 있고, 중국은 나라의 서쪽에 있는데 순풍(順風)이면 20일 만에 도착할 수 있다고 하였다.

1. 다만 모든 도적은 다 주륙(誅戮)하였는데, 혹은 국왕이 친히 국문(鞫問)하고 군사들이 잡아가서 성(城) 밖에서 죽이었다. 혹은 관부(官府)에서 유사(有司)가 죄를 다스려서 죽이기도 하였다.

1. 수산(水産)은 오로지 어물(魚物)뿐이었고, 육지에 있는 것은 오로지 배나무·밤나무·복숭아·종려나무·소나무·상수리나무·왜귤(倭橘)나무 뿐이었다.

1. 처음에 미아괴도에 이르렀더니, 본도(本島) 사람과 인근의 굴이마도(屈伊麻島)·일남포도(日南浦島)·시마자도(時麻子島)·우감도(于甘島)의 5섬 인민(人民) 들이 서로 왕래하면서 술을 마셨는데, 매양 서로 갈 때마다 반드시 초득성(肖得誠) 등을 청하여 후하게 위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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