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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중엽 유구국 견문기 하나 백두산 이야기

1456년(세조 2) 제주에서 근무하던 선군(船軍) 양성(梁成) 등과 1462년(세조 8) 나주 사람 초득성(肖得誠) 등 8명의 사람이 표류하여 유구에 다녀온 기록이 각각 실록에 보이고 있네요(≪세조실록≫권27, 세조 8년(1462) 2월 16일). 앞서 살핀  16세기 중엽 박손(朴孫) 등의 유구국 견문기(http://coreai84.egloos.com/10483826)보다 소략한 점이 보이지만, 몇 가지 표기 방식에서 차이점이 나타나 여기에 정리해 두어요. 틈을 내어 각 견문기의 내용을 비교하여 정리하도록 할게요.

무엇보다도 ‘본국(本國)’이라는 표기인데, 이것이 유구국 본토를 뜻하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나라를 뜻하는 것인지 구분하기가 힘들었어요. 둘째, 거리 표기에 시간적 개념이 짙은 ‘식(息)’을 쓰고 있는 특이한 점을 보이고 있어요. 여전히 남는 문제는 양성 등의 견문과 초득성 등의 견문이 무려 6년이라는 시간적 차이가 남에도 이를 함께 실었다는 점이라 하겠네요.

 

처음에 병자년(1456, 세조 2) 정월 25일에 선군(船軍) 양성(梁成) 등이 제주(濟州)에서 배를 출발하여 바람을 만나서 2월 초2일에 표류하다가 유구국(琉球國)의 북쪽 방면 구미도(仇彌島)에 이르렀다. 섬 주위의 둘레는 2식(息) 가량이었고, 섬 안에 작은 석성(石城)이 있어서 도주(島主)가 혼자 거주하였고, 촌락(村落)은 모두 성 밖에 있었다. 섬에서 그 유구국까지의 거리는 순풍(順風)의 뱃길로 2일 노정(路程)이었는데, 양성 등이 섬에 머무른 지 1개월 만에 공선(貢船)을 타고 그 나라에 이르러, 물가에 있는 공관(公館)에 거주하였다. 공관(公館)은 왕도(王都)에서의 거리가 5리 남짓하였고, 공관 옆 토성(土城)에는 1백여 가(家)가 있었는데, 모두 우리나라와 중국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며, 매 집으로 하여금 날마다 돌려가면서 양성 등을 공궤(供饋)하게 하였다. 1개월이 지난 뒤에 왕성(王城)에 갔는데, 왕성은 3겹으로 되어 외성(外城)에는 창고(倉庫)와 마구(馬廐)가 있었고, 중성(中城)에는 시위군(侍衛軍) 2백여 명이 상주하고 있었고, 내성(內城)에는 2∼3층의 전각(殿閣)이 있었다. 대개 근정전(勤政殿)과 같았는데, 그 왕(王)이 길일(吉日)을 택하여 왕래하면서 그 전각에 거(居)하였으며, 판자(板子)로 지붕을 덮고 판자 위에는 납(鑞)을 진하게 칠하였다. 상층(上層)에는 진귀한 보물(寶物)을 간수하였고, 하층(下層)에는 주식(酒食)을 두고, 왕(王)은 중층(中層)에 거하고 시녀(侍女) 1백여 인이 있었다. 그 나라의 지세(地勢)는 중앙이 협소(狹小)하여 혹은 1∼2식(息) 거리이나, 남북은 광활(廣闊)하여 그 끝을 볼 수 없었는데, 대개 장구[長鼓]의 모양과 같았다. 나라에는 큰 강[川]이 없고, 국도(國都)에서 동북쪽으로 5일 노정(路程)의 거리에 큰 산(山)이 있었으나, 산에는 잡(雜)된 짐승이 없었고 다만 돼지[猪]만 있을 뿐이었다. 섬 안에는 군현(郡縣)을 설치하고 석성을 쌓아서 관(官)의 수령[守者]이 1인씩 있었는데, 도로의 서로 떨어진 거리가 혹은 1식(息), 혹은 2식(息), 혹은 반 식(息) 정도였다. 거주하는 백성들은 혹은 조밀(稠密)하기도 하고 혹은 드물기도 하였는데, 이(里)마다 각각 장(長)이 있었고, 공사(公私)의 집들이 크고 작은 것 없이 그 제도가 모두 한 일자(一字) 모양과 같았고 구부러진 곳이 없었으며, 띠풀[茅草]로 지붕을 덮었다. 그 나라는 항상 따뜻하여 서리와 눈이 없고 추운 겨울이 4월과 같아서 초목(草木)이 시들어져 떨어지지 아니하고, 옷에는 솜을 두지 않고, 말 먹이는 항상 푸른 풀을 사용하였고, 여름 해가 정북쪽에 있었다.

1. 절일(節日)·원일(元日)에는 짚으로써 왼쪽으로 꼰 새끼를 문(門)위에 걸쳐 놓고, 또 나무를 쪼개어 묶음[束]을 만들어서 쌓인 모래 위에 두고, 그 가운데 떡그릇[餠器]을 얹으며, 또 소나무를 가지고 묶은 나무[束木] 사이에 꽂는데, 5일이 지나서야 그만두었다. 그 풍속에 이를 기양(祈禳)한다고 이르며, 또 술을 두고 서로 즐기었다.

1. 7월 15일에 불사(佛寺)에 올라가 죽은 어버이의 성명(姓名)을 써서 안상(案床)위에 놓고 쌀을 상(床) 위에 올리고, 댓잎[竹葉]으로 땅에 물을 대는데, 중은 불경(佛經)을 읽고, 속인(俗人)은 예배(禮拜)하였다.

1. 노비(奴婢)는 일본인(日本人)이었는데, 비록 가까운 친족(親族)이라도 모두 사서 노비로 삼았고, 국왕(國王)의 친근(親近)한 사령(使令)들은 모두 사들인 자였고, 혹은 여국인(女國人)이 와서 노비로 바친 자들도 있었다.

1. 공장(工匠)은 단지 주장(鑄匠)과 목수(木手)만을 쓰고 나머지는 모두 보지 못하였다.

1. 포진(鋪陳: 멍석. 돗자리.)은 완초(莞草)로써 짠 자리였는데, 본국(本國)과 같았고, 혹은 중국에서 사온 것이었다.

1. 의복과 음식은, 남자의 복장이 본국의 직령(直領)의 제도와 같았는데, 다만 소매가 넓을 뿐이었고, 빛깔은 흑색·백색을 좋아하였으며, 여자의 복장은 의상(衣裳)이 하나같이 우리나라와 같았으며, 군신(君臣)과 상하(上下)의 남녀(男女)는 모두 관(冠)이나 두건(頭巾)을 쓰지 않았다. 걸을 때는 맨발로 다니고 화혜(靴鞋) 따위의 물건이 없었고, 모든 소와 말의 가죽은 모두 관(官)에 바쳐서 갑옷을 만들었으며, 그 음식을 먹을 때에는 숟갈과 젓가락이 없었고, 완초(薍草: 억새풀.)를 꺾어서 젓가락같이 만들어서 먹었다.

1. 남자는 말을 타는 것이 보통과 같았으나, 부인(婦人)들은 말을 탈 때에는 모두 양다리를 내리고 말 등에 걸터앉는데, 마치 교자상(交子床)에 앉아서 가는 것과 같았다.

1. 전화(錢貨)는 흥용(興用)하는 것이 전화(錢貨)이었으나, 그 주조(鑄造)하여 만드는 방법을 알지 못하고 모두 중국에서 얻어다가 사용하였는데, 정축년(1457, 세조 5) 에 중국 사람들이 처음으로 와서 가르쳤으며 10문(文)이 쌀 1되[升]에 준(准)하였다.

1. 장사치[商賈]들이 강(江) 연안에 배를 정박(碇泊)시키는 곳에 일본 여국(女國) 사람들도 또한 와서 교역하였다.

1. 두승(斗升)은 되[升]가 우리나라와 같았고, 말[斗]이 혹은 5되를 담기도 하고, 혹은 10되를 담기도 하고, 혹은 30되를 담기도 하였다.

1. 경점(更點)은 대궐 남문(南門)에 나무로써 누기(漏器)를 만들었는데, 그릇의 몸체는 둥글고 그 가운데가 비어 있고, 그 배에다 구멍을 뚫어서 물을 정량(定量)하여 부어 넣은 다음 물이 다 없어지는 것을 헤아려서 이를 1경(更)이라고 하며, 드디어 북[鼓]를 쳐서 알렸다. 북치는 수는 그 경(更)의 수와 같았고, 인정(人定)·파루(罷漏)는 본국과 다름이 없었다.

1. 조회(朝會)는 먼 지방의 읍장(邑長)들이 길일(吉日)을 택하여 잔치상을 준비하여 대궐 뜰에 바치는데, 국왕은 층각(層閣)에 있으면서 내려오지 않으며, 여러 신하들이 뜰에 있으면서 음식을 먹었으나, 음악(音樂)이 없고 헌작(獻爵: 임금에게 술을 올리는 일.)도 없었다.

1. 영조칙(迎詔勅)은 중국의 조칙(詔勅)과 우리나라의 서계(書契)가 나라에 이르면 배가 정박하는 첫 지면(地面)에 기(旗)·둑(纛)·개(蓋) 등의 물건으로 의장(儀仗)을 설치하고, 또 군사들이 갑옷과 투구를 갖추고 나가서 맞이하는데, 조칙(詔勅)이나 서계(書契)를 여교(轝轎: 수레.)에 봉안(奉安)하고, 그 곁을 따르면서 북과 징을 울리고 태평소(太平簫)를 불면서 왕실(王室)로 맞아들였다. 왕(王)이 강의(絳衣)를 입고 관(冠)을 쓰고 절을 한 다음 앉으면, 이를 개독(開讀)하였다. 국왕은 항상 층각(層閣)에 있으면서 내려오지 않고, 부인(婦人)을 시켜 왕명(王命)을 전(傳)하며, 속인(俗人)은 관복(冠服)이 없이 모두 막배(膜拜: 두 손을 들고 땅에 엎드려 절하는 방식. 주로 동남아시아 사람들의 절하는 방식이다.)를 행하였다. 이때가 되면 뜰로 내려와 절하고 꿇어앉기를 대략 예법(禮法)과 같이 하였다.

1. 상장(喪葬)은 본래 국왕이 죽으면 일체 시위(侍衛)에 응(應)해야 하는데, 주민(住民)은 마관(麻冠)·마의(麻衣)를 입고 곡(哭)하여 슬픔을 다하고 14일[二七日]만에 끝내었다. 모든 백성들이 부모의 상(喪)을 당하면 족친(族親)들이 상가(喪家)에 모여서 조상(弔喪)하고 곡(哭)하며, 상(喪)을 당한 사람은 흰옷[白衣]을 입는데, 모두 3일 뒤에야 고기를 먹으며, 7일 안에는 살생(殺生)하지 않았다.

1. 국왕의 장례(葬禮)는 바위를 파서 광(壙)을 만드는데, 광(壙) 안의 사면(四面)에 판자(板子)를 짜서 세우고, 드디어 관(棺)을 내려 묻은 다음에 판자 문(門)을 만들어 자물쇠를 채우고, 묘(墓) 앞과 양쪽 옆에다 집을 짓도록 하여서 묘(墓)를 지키는 사람이 거주하며, 묘를 빙 둘러서 석성(石城)을 쌓는데 성(城)에는 하나의 문(門)이 있었다. 보통 사람의 장례(葬禮)는 광(壙)을 파서 관(棺)을 묻는 것은 같았으나 다만 집을 짓고 성(城)을 쌓는 따위의 일이 없을 뿐이었다.

1. 혼가(婚嫁)는 혼인(婚姻)할 때에 남자 집에서 먼저 중매(中媒)를 하여 혼인을 약정(約定)하고 날짜를 택하는데, 남자 집의 친족(親族) 여자가 신부집에 가서 신부를 데리고 집에 돌아와 행례(行禮)하며, 그날 밤에 양쪽 집 족친(族親)이 모여서 술을 마시다가 헤어졌다.

1. 제사는 그 나라에 제향(祭享)이 없었다.

1. 조관(朝官)은 무릇 사람을 쓸 때에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의 천거(薦擧)를 들어주고 관(官)에서 노비(奴婢)·토전(土田)·집[家舍]과 군기(軍器) 등의 물건을 주며, 만약 유능하지 못하면 파출(罷黜)하고 아울러 그에게 주었던 물건을 회수하였다. 상시로 1백여 인이 대궐 안에 있으면서 정사를 다스리는데, 5일씩 서로 교체(交遞)하였고, 또 4∼5인의 장번(長番: 교대하지 않거나 장기간 근무하는 관원.)이 있어서 대궐을 나가지 않는데, 만약 자기 뜻대로 자주 출입(出入)하는 짓을 행하면 파출하기를 위와 같이 하였다. 그 입번(入番)할 때에는 모두 공름(公廩)에서 녹을 받고, 그 중에 1인이 우두머리가 되어 이들을 총괄하여 다스렸다.

1. 도적(盜賊)은 본국(本國)에서는 도적이 없고, 일본(日本)에서 팔려간 자들이 왕왕 남의 재물(財物)을 훔치는데, 체포하여 국문(鞫問)하고 죄가 크면 이를 주륙(誅戮)하고 작으면 다른 섬에 유배(流配)하였다. 그 추국(推鞫)하는 법은 태형(笞刑)·장형(杖刑)이 없고, 다만 땅에 두 개의 판자를 겹쳐 놓고 죄인의 다리를 그 사이에 끼워서 그 양쪽 끝을 묶고 사람으로 하여금 올라가서 휘어지게 하는데 한쪽 끝에 3인에 지나지 아니하였다.

1. 농상(農桑)은 여러 가지 곡식이 모두 있었으나 다만 팥[小豆]·보리[大麥]·녹두(菉豆)가 없었다.

1. 뽕나무·삼·목면(木綿)이 없었고, 다만 생저(生苧: 생모시.)가 있었는데, 그 길이가 2장(丈)쯤 되었으며, 1년에 세 번 취(取)하였다.

1. 한전(旱田)과 수전(水田)은 쟁기[耒耜]를 사용하지 아니하고 손으로써 매만졌고, 매 10월에 모종하였다가 다음해 정월에 모를 나누어 심어서, 5월이 되어 익으면 그 이삭을 베고 짚 줄기를 베지 않는데, 거기에서 곁가지 모가 또 번성하여 10월에 다시 거두었다. 전지를 매만지는 데 다만 삽(鍤)으로 할 뿐이었고, 쟁기를 사용하지 아니하였다.

1. 소산(所産)은 금(金)과 은(銀)이 나지 아니하여 남만(南蠻)·일본(日本)에서 사서 사용하였다.

1. 금수(禽獸)는 가축으로서 소·말·돼지·닭·개가 있었고, 날짐승으로서 까마귀·참새가 있었는데, 그 풍속이 앵무(鸚鵡)새를 가지고 놀기를 좋아하여 항상 중국에서 사왔었다.

1. 수륙(水陸)의 산물은 물에서 나는 것이 다만 어물(魚物)뿐이었고, 육지에서 나는 것은 유자(柚子)·귤(橘)·감(柑)뿐이었다.

1. 군사(軍士)는 군사 1백여 명을 정원으로 하여 날마다 바꾸어 숙직(宿直)을 교대하였으나, 그 원래의 수는 쉽게 자세히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군사 장비와 갑옷·투구는 본국과 다름이 없었다. 쇠로써 조각을 만들어 그 얇기가 종이짝 같은데 갑령(甲領)에 붙이니, 마치 목을 보호하는 문양(文樣)과 같았다. 또 쇠로써 인면(人面)을 만들어 얼굴 위에다 붙이는데, 그 모양이 마치 탈과 같았다. 환도(環刀)·방패·창(槍)은 본국과 다름이 없었으나, 다만 쇠로써 4가지가 난 날[刃]을 만들어 그 모양이 굴곡이 있고 2장(丈)쯤 되는 나무로써 자루를 만들어 사용하는데, 그 풍속에 이를 구(拘)라고 이르며, 먼 곳의 죄인을 참형(斬刑)하는 병기(兵器)였다.

1. 화통(火筒)은 그 크고 작은 것과 체제(體制)가 하나같이 본국의 제도와 같았다.

1. 궁시(弓矢)는 뽕나무로써 활을 만들고 저사(苧絲)로써 시위를 만드는데, 활은 본국의 마전(磨箭: 화살의 깃이 좁고 철촉(鐵鏃)이 작은 화살.)과 같았으며, 혹은 대나무로써 활촉을 만든 것도 있었다.

1. 교린(交隣)은 중국과 일본국(日本國)·여국(女國)과 서로 통호(通好)하였으나, 그러나 종종 하는 것이 아니었다.

1. 중국과의 정도(程途)는 동남풍(東南風)을 따라서 배가 7일 동안 가면 도착하고, 일본과의 정도(程途)는 서풍(西風)을 따라서 배가 18일 동안 가면 도착하였다.

1. 공전(攻戰)은 나라의 동쪽에 두 섬이 있었는데 하나는 지소도(池蘇島)이고 하나는 오시마도(吾時麻島)였으니, 모두 항복 귀부(歸附)하지 않았다. 오시마도는 공격 토벌하여 귀순(歸順)한 지가 지금 이미 15여 년이나, 지소도는 매년 토벌하기에 이르지만 아직도 복종(服從)하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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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스토리작가tory 2010/12/28 13:34 # 답글

    오히려 중국과 훨씬 가까웠었군요..
  • 고리아이 2010/12/28 18:13 #

    그래서 유구와 조선은 정식 외교관계가 있었지요
    조선은 일본과는 정식 외교관계가 없었고, 쓰시마가 중계하는 형식을 취했고요
  • 킹오파 2010/12/28 13:38 # 답글

    유구국이라면 류큐국 아님? 그 나라도 중국과 친하고 조공을 조선처럼 자주 바친걸로 아는데...
  • 고리아이 2010/12/28 18:14 #

    옙 맞습니다영
    류큐국
    그래서 조선도 류큐와 친했답니다영^_^))
  • 스토리작가tory 2010/12/28 18:26 # 답글

    그럼 류큐와 일본의 관계는 어떠했나요? 정복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혹시 여쭤도 될까요?
  • 고리아이 2010/12/28 18:33 #

    일본의 류큐 점령 병합은 제국주의 과정에 이루어지죠
    1879년 4월 4천여 명의 군경을 동원하여 무력으로 점령 병합하고
    오키나와 현을 설치하죠. 이 때부터 일본은 청과 날카롭게 대립하여
    1895년 청·일전쟁의 씨앗이 되었답니다.

    이와 관련한 일본의 움직임을 간단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874 타이완 침공
    1875 쿠릴열도 점령
    1876 조선 강제 개국(운요호 사건, 강화도 조약)

    강혁·네 툰 나잉 2009 ≪아시아는 일본의 만행을 결코 잊지 않는다≫(황금나무), 16쪽.
  • 스토리작가tory 2010/12/28 18:46 # 답글

    오호.. 답변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럼 그전의 류큐는 일본과는 정말 별 상관없는 나라였나요? 거리 때문인지 탐라하고는 조금 많이 다르네요.
  • 독자 2010/12/28 19:01 # 삭제

    1609년 일본의 사쓰마 번의 침공을 받아서 예속된 바 있습니다.
  • 고리아이 2010/12/29 02:36 #

    독자님의 지적대로 1609년 사쓰마 번 군대에게 침공을 받기는 했지만, 일본의 실질적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 것은 1879년이라고 하네요__참조: http://blog.naver.com/okinawa2go/40115936791
  • 첫걸음 2010/12/28 23:32 # 답글

    안녕하세요? 아이디그대로 첫걸음입니다. ㅎㅎ 유구국에 대한 귀한 자료를 잘 봤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유구국이 상당히 독특한 국제관계를 맺은 나라라고 들었어요.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중국과 조공-책봉관계를 맺었다가 임진왜란 이후 사쓰마 번의 시마즈 가문에게 예속되었다고 들었는데,제가 듣기로는 청과 에도막부 사이에서 이중 예속 관계에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근데 처음에는 사쓰마 번과의 예속관계인 것은 알겠는데 이후 어떻게 에도 막부와 관계를 맺었는지 궁금하군요.
  • 고리아이 2010/12/29 02:41 #

    첫걸음님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다카라 구라요시 지음ㆍ원정식 옮김 2008 ≪류큐 왕국≫(한림신서 일본학총서89), 소화

    제가 살고 있는 의정부도서관에도 있네요
    님께서 계시는 곳 가까운 도서관에 가보셔요^_^))
  • 스토리작가tory 2010/12/29 02:44 #

    호오.. 이책 저도 보고 싶네요. 위의 자료도 그렇고 수고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고리아이 2010/12/29 03:00 #

    허걱 스토리작가tory님께서 아직 주무시지 않으셨네영 ㅎㅎ
    데데한 제 글에 관심을 주시는 님께 고마울 따름이지영
    저도 덕분에 공부도 하고영
    건강한 밤 보내세영^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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