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로그


≪삼성당사적≫ 하나 Corean Holy Places

우리나라 4대(또는 5대) 명산* 가운데 하나인 구월산은 오늘날 황해남도 은율군과 안악군 경계에 자리하고 있다. 구월산의 이름과 함께 언제나 따라 다니는 것을 하나 꼽으라면, 바로 환인ㆍ환웅ㆍ단군을 모신 삼성사(三聖祠)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다가 구월산 삼성사와 관련한 기사, 특히 ≪삼성당사적三聖堂事跡≫이라는 책이름이 보여 여기에 정리하여 둔다. 이에 대해 일찍이 허흥식 교수가 세기말에 <九月山 三聖堂事跡의 祭儀와 그 變化>(1999, ≪단군학연구≫창간호)라는 글을 발표하여 정리한 바 있다. 이미 허 교수가 정리한 글을 여기에 감히 데데한 생각을 넣어 다시 정리함은 “Corean Holy Place”의 내용에 자리하기에는 넉넉한 정도가 아니라 너무나도 큰 까닭이다.

 

* 본디 ‘명산(名山)’은 단순히 이름난 산이 아닌 신성한 곳(Holy Place; Holy Mountain)으로서 우리나라 전통 종교의 제사장(祭祀場)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용어다_‘대천(大川)’ 또한 단지 규모가 큰 가람이 아닌 신성한 가람(Holy River)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오늘날에는 경치가 아름답거나 산행하기 좋은 산 정도의 의미로 변했지만 말이다. 누리집 검색을 통해 보면, 4대 명산으로는 지리ㆍ덕유ㆍ한라ㆍ삼각이고, 5대 명산으로는 설악을 더하고 있다. 아마도 DMZ이남의 산만을 꼽은 듯하여 아쉽다. 2002년 ‘세계 산의 해’를 맞이하여 산림청에서 100대 명산을 꼽았는데, 이 또한 아쉽게도 DMZ이남만의 산이다(http://heavenspark1.com.ne.kr/).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 일찍이 서산 휴정 스님이 4대 명산으로 금강ㆍ지리ㆍ구월ㆍ묘향을 이야기하였고(http://seungboo10.blog.me/80037071271), 5대 명산으로 한라(또는 백두)를 더하고 있는데(http://blog.daum.net/mounification/8768249; http://cafe.naver.com/ryurim/210), 언제 누구에게서 유래한 것까지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일찍이 구월산은 조선이 개창하고 나서 국가가 관장하는 제사를 지내던 제사장(태종 15년(1415) 2월 13일; 세종실록지리지 황해도)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때 환인ㆍ환웅ㆍ단군의 삼성에게도 제사를 지냈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그러다가 세종대 문화현이 관향이던 유관과 그의 조카 유사눌이 세종에게 올린 상서문의 내용에 비로소 삼성당=삼성사와 관련한 내용이 보이고 있다.

 

우의정으로 그대로 치사(致仕)한 유관(柳寬)이 상서(上書)하였다: “황해도 문화현(文化縣)은 신의 본향(本鄕)입니다. 스스로 벼슬을 그만두고 본향에 내려온 지가 여러 해 되었는데 여러 부로(父老)들의 말을 듣고 비로소 사적(事迹)이 오래인 것을 알았습니다. 구월산(九月山)은 이 현의 주산(主山)입니다. 단군 조선 때에는 이름을 아사달산(阿斯達山)이라고 하였고, 신라 때에 이르러 궐산(闕山)이라고 고쳐 불렀습니다. 그때에 문화현을 처음으로 궐구현(闕口縣)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전조(前朝)에 이르러서는 유주 감무(儒州監務)로 승격시켰으며, 고종 때에 이르러 또 문화 현령(文化縣令)으로 승격하였고, 산 이름의 ‘궐’자를 느린 소리로 발음하여 구월산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 산의 동쪽 재[嶺]는 높고 크고 길어서 일식 정도 가야 안악군(安岳郡)에 이르러 끝납니다. 재의 중허리에 신당(神堂)이 있는데 어느 시대에 처음 세웠는지 알지 못합니다. 북쪽 벽에는 단웅 천왕(檀雄天王), 동쪽 벽에는 단인 천왕(檀因天王), 서쪽 벽에는 단군 천왕(檀君天王)이 있는데, 문화현 사람들은 언제나 삼성당(三聖堂)이라 부르며, 그 산 아래에 있는 동리를 또한 성당리(聖堂里)라고 일컫습니다. 신당의 안팎에는 까마귀와 참새들이 깃들이지 아니하며, 고라니와 사슴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날씨가 가물 때를 당하여 비를 빌면 다소 응보를 얻는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단군은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으니, 아마도 단군의 도읍이 이 산 아래에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삼성당은 지금도 아직 있어서 그 자취를 볼 수가 있습니다. 지금 땅 모양을 살펴보건대, 문화현 동쪽에 이름을 장장(藏壯)이라고 하는 땅이 있는데, 부로들이 전하는 말에 단군의 도읍터라고 합니다. 지금은 증험(證驗)이 될 만한 것은 다만 동서 난산(東西卵山)이 있을 뿐입니다. 어떤 이는, ‘단군이 왕검성(王儉城)에 도읍하였으니, 지금 기자묘(箕子廟)가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라고 말합니다. 신이 살펴본 바로는 단군은 요(堯)와 같은 때에 임금이 되었으니, 그 때부터 기자에 이르기까지는 천여 년이 넘습니다. 어찌 아래로 내려와 기자묘와 합치하여야 한단 말입니까. 또 어떤 이는, ‘단군은 단목(檀木) 곁에 내려와서 태어났다 하니, 지금의 삼성(三聖) 전설은 진실로 믿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이 또 살펴보건대 태고(太古)의 맨 처음에 혼돈(混沌)이 개벽(開闢)하게 되어 먼저 하늘이 생기고 뒤에 땅이 생겼으며, 이미 천지(天地)가 있게 된 뒤에는 기(氣)가 화(化)하여 사람이 생겼습니다. 그 뒤로 사람이 생겨나서 모두 형상을 서로 잇게 되었으니, 어찌 수십만 년 뒤 요 때에 다시 기가 화하여 사람이 생겨나는 이치가 있었겠습니까. 그 나무 곁에서 생겼다는 설은 진실로 황당무계한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감(聖鑑)으로 헤아려 결정하시고, 유사(攸司)에 명하여 도읍한 곳을 찾아내어 그 의혹을 없애게 하소서.”

임금이 보류(保留)하여 두라고 명하였다.[세종실록; 세종 10년(1428) 6월 14일(을미)]

 

▲ 유관의 상서문_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http://sillok.history.go.kr/)

 

유관의 상서 내용의 핵심이 비록 그의 관향에 대한 자부심에 비롯하였더라도, 단군의 사적과 관련한 도읍지로서의 구월산을 강조한 내용임에 틀림없다(물론, 유영(柳潁:?~1430)이 1423년(세종 5) 문중의 족보 ≪문화유씨세보文化柳氏世譜≫를 완성하고 지은 경기체가 <구월산별곡>(http://blog.naver.com/ant1ms6/10020772736)에서는 구월산과 단군 도읍지를 연관시킨 내용이 전혀 없다.). 여기서 세종이 보류하라는 명령은 유관의 상서문 자체인 듯하다. 왜냐하면 이듬해 평양에 단군 사당을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세종실록지리지≫에 보인다. 유관의 상서문 가운데 눈에 띠는 부분은 바로 ‘궐(闕)’과 ‘구월(九月)’에 대한 설명이다. ‘궐’이라는 이름은 신라(아마도 남북국시대)가 붙인 이름인데, 그 소리값의 느린 소리(緩聲)가 고려 때에 이르러 ‘구월’로 자리 잡게 된 설명은 오늘날 어떤 어문학자에게 내놓아도 참으로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설명이다. 그리고 구월산의 단군조선 당시 이름은 ‘아사달’이었다. 그렇다면 어떤 과정을 거쳐 ‘궐’이 되었는지를 구명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하겠다.




덧글

댓글 입력 영역


노무현대통령추모

김대중대통령추모

언론악법 원천무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