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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송우리 장승_손진태 장승나라를 보았니?

1934년 10월 30일 남창南滄 손진태 선생은 송석하 선생, 아카마쓰 치죠(赤松智城), 아키바 다카시(秋葉隆) 등과 함께 포천 송우리에 있는 장승을 조사한다. 그러면서 장승의 이름과 동네의 신앙, 제례 및 장승과 관련한 여러 행사들을 당시 송우리 구장과 장승굿 주제자인 신녀 이경래와의 담화를 정리한다. 장승의 목재는 소나무로 하는데, 남성 동민 여럿이 산에 들어가 골라 경험 있는 장승 조각가에게 맡겨 장승을 세운다. 송우리에는 모두 두 곳에 장승이 세워져 있음을 전한다. 곧, 동네 한 가운데와 아래 솔모루(하송우리) 입구인데, 동네 한 가운데 있는 장승 곁에는 향나무와 오래된 단풍나무가 함께 하고 있다고 전한다.

태어난 곳이 포천의 외진 관인이지만, 배운 게 도둑질이라 역사학과 인연을 맺은 지 어언 20여 년이 지났음에도 포천과 관련한 글이나 그림을 만나면 반갑기 그지없다. 송우리를 지날 적마다 일찍이 지훈 조동탁 선생이 ‘솔[松]’이 들어가는 지명이 ‘서라벌’이라는 이름과 깊은 연관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내용(http://coreai84.egloos.com/5402245)을 떠올린 적이 있었다. 한편, 송우리는 오늘날 소흘(蘇屹)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데, ‘솔’이라는 이름의 이두 표기임을 바로 알 때, 지훈 선생의 선견지명을 다시 한 번 엿볼 수 있다. 그런데 남창 선생은 송우리라는 지명에 ‘솔모루’라는 이름을 더하여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http://stdweb2.korean.go.kr/main.jsp)에서는 ‘솔모루’가 북한어로 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 송우리 사람들이 스스로 일컫던 이름이 이제는 북한어로 바뀌었다. 아마도 ‘솔모루’라는 지명이 ‘송우리’보다 시기가 앞서는 고유 지명이라 생각하면서 국어학자들의 보다 깊은 조사와 연구를 바란다.


△ '솔모루'에 대한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의 설명

 

‘송우리/소흘/솔모루’ 라는 이름에 걸맞은 역사적 흔적은 어떤 것이 있을까. 지방사 관련 자료가 턱없이 부족한 가운데 남창 선생의 글은 너무나도 반가울 뿐이다. 게다가 귀한 장승 그림까지 함께 있어 더할 나이 없이 기쁘다. 나아가 바람이 있다면, 이제는 사라진 송우리 장승의 기억을 되살려보고 또 이를 오늘날 송우리에 인연 있는 시민들이 되살려봄도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래서 남창 선생의 글을 원문 그대로 소개하고자 한다. 그런데 국립중앙도서관 전자도서관에서 만난 선생의 글은 아쉽게도 246쪽 아랫부분이 파손되어 있었다. 그래서 수소문 끝에 조선일보사 독자서비스센터의 친절함을 통해 남창 선생의 글을 복사본으로 우편을 통해 오늘(10.10.04) 받아 정리하였다(원문의 내용은 띄어쓰기만 하고 표기는 그대로 살린다).
 

△ 포천 송우리 장승 하나_출처: ≪朝光≫

 

1. 松隅里의 長栍及 그 名稱

 

再昨年十月三十日 畏友 宋錫夏 城大敎授 赤松智城 秋葉隆 等 三氏로 더부러 나는 抱川郡 松隅里의 長栍을 調査하였다.

나는 西洋人의 著書들 中에서 容貌가 魁偉하고 一處에 數多히 列立하여 있는 堂堂한 長栍의 揷圖를 흔이 보았으며 또 그것은 모두 同一한 長栍인 듯한 感을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所在處所를 大槪 記示치 않이하였고 어떤 이는 그저 京城 郊外라고만 하여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長栍들이 지금도 現存하여 있는지 또 그는 塲所가 어데인지 其히 궁금히 생각하여 오든 다음이었다. 그렇던 中에 前記 兩 敎授로부터 松隅里에 數多한 長栍이 現存하다는 所聞이 있으니 함께 가 보지 않겠느냐 하는 勸誘를 듯고 卽席에 同意하야 翌朝에 四人이 同行한 것이었다. 그때 나는  松隅里의 그것이 或은 西洋人의 紹介한 그것이 안이었든가 하는 생각을 內心에 가지고 있었다. 及其也 當場에 가서 調査한 結果 現存의 그것이 곳  西洋人들의 紹介한 한 그것이 아닌 줄 알었으나 그들의 紹介한 그것의  所在處가 松隅里에 있을 것이라는 것만은 짐작하게 되였다. 그것은 現存한 松隅里의  長栍을 彫刻한 그 手法이 大體로 그들의 紹介한 그것의 手法과 同一하고 里老의 말에 依하면 現存 長栍을 建立하기 前에는 지금 것보다 더 훌륭한 것이 그  塲所에 더욱 數多히 서서 있었드라고 하며 또 이  松隅里(俗名 솔모루)는 京城 으로부터 元山에 向하는 昔年의 大路이므로 西洋人 旅行家들은 大槪 이 길을 지내가며 그 獨特한 魁偉한 手法으로 되고 또 그 數多히 列立하였 있는  長栍에 對하야 반다시 好奇心을 惹起하였으리라고 생각되는 까닭이었다.

 서울서 大路에 沿하야 議政府를 지나  松隅里를 드러가면 그 洞里 兩側에 七個의 木長栍이 있다. 그 넷은 男神으로 南面하여 있고 남어지 셋은 女神으로 北面하였(여!) 있다. 卽 三女栍과 四男栍이 道路 兩側에 相向하여 섰다. 그러고 그 男栍 三個의 前部에는 陰刻의 銘記가 있어 그 一者에는 甲子四月十二日造成 自京城八十里라 하였으니 이것은 十二年前의 所立이오 또 一者에는 戊辰四月五日造成 自京城八十里라 하였으니 이것은 七年前의 所立이오 他의 一者에는 壬申五月日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三年前의 所建이다. 正確한 測定은 못하였으나 長栍의 長은 大略 地上 八尺許이었다.

그러고 洞里 中央의 道路 兩側에도 四栍이 있어 二者는 南面하여 선 男神으로 일 그에는 前部 中央에 天下大將軍이라 陰刻하고 그 側에 또 戊辰四月初五日造成이라 하였으며 他一에는 天下大將軍 壬申五月十三日建이라고 하였다. 그러고 이 두 男栍은 頭上에 宕巾과 冠이 彫刻되여 있고 口部에는 獸毛로서 三角鬚를 꽂었으며 近日의 뺑끼(塗料)로써 丹面丹體를 이루워 있고 그 옆에는 큰 香나무가 서 있으며 二栍의 뒤에는 腐敗된 昔年 所立의 男栍 一體가 放棄되어 있었다.

北面하여 서 있는 二女栍에는 地下女將軍이란 陰刻이 있고 또 그 一에는 壬申五月十三日이라고 一側에 陰刻하였으며 두 女栍의 顔面에는 兩頰과 下顎 及 額上에 亦是 뺑끼로 臙脂를 施하고 靑面靑體를 이루어 있었다. 그러고 그 側에는 老丹楓木이 서 있고 頭上에는 아모 冠物彫刻을 볼 수 없었다.

男栍에 丹을 施하고 女栍에 靑을 施한 것은 洞口의 七栍에 있었어도 맛찬가지이었다.

이렇게 長栍이 洞里 中央에 있는 것은 좀 異常한 일이나 생각하건대 이 長栍 所立 地點이 昔年에는 아마 洞里 끝으로서 元山으로 京城에 向하는 後方의 入口이었으므로 거기 長栍을 建立하였든 것이 지금은 村落이 發展되여 後方에 民家가 서게 되였으므로 現狀으로는 中央이 된 모양이나 古來로 거기 長栍을 세우든 곳이므로 그 傳統을 직히여 지금도 그 地點에 建立하는 것이 안일가 한다.

그러고 아래솔모루(下松隅里)의 道路 兩側에도 十數許의 長栍이 있고 또 그것들은 松隅里의 그것에 比하야 좀 더 오래된 것이었으나 이것은 元來의 塲所에 있지 않고 道路 改修의 際에 小規模의 洋鐵 집웅둘을 맨들어 各各 그 中에 移植 保存되어 있으므로 地上의 現高도 四尺許에 지나지 못하고 長栍 互相 間의 距離도 極히 狹近하야 一見한 바로서도 겨우 保管되여있는, 古物의 感을 이르키게 하며 또 事實에 있어서도 그것에 對한 信仰이 昔年과 如히 部落的으로 盛하지 않이한 모양이나 個人的 小規模의 祈禱는 아즉도 行하는 모양이었다. 그것은 이에 對한 村落的 祭禮가 이미 廢止되였음에도 不拘하고 아즉도 오히려 그 周圍에 祈禱時에 使用한 破器 破瓢 等(飮食을 담었든)을 많이 發見할 수 있음에 依하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고 長栍은 普通 장승이라고 하나 때로는 ‘先王대’라고도 하며 또는 ‘都堂대’, ‘厄맥이대’ 等으로도 稱謂되었다.

 

2. 信仰과 祭禮

 

이 長栍에 對한 松隅里民의 信仰은 다른 地方의 그것과 조곰도 다르지 안이하야 첫재 部落的으로는 그것은 雜鬼 雜神 及 殺의 侵入을 防禦하야 全部落을 疫病 火災로부터 守護하는 神性을 갖었으며 둘재 個人的으로는 主로 兒童의 疾疫을 救治하며 厄數 其他의 災禍를 救하는 神性을 갖이었다.

그러하므로 個人的으로는 兒病 及 其他의 家禍가 있을 때 隨時로 이에 向하야 濁酒 及 飯餠 菜菓 又는 明太魚 等으로 祈禱를 行하며 厄막이를 爲하야는 布片울 栍體에 懸納하고 또 或 篤信者는 平常時에도 朔望으로 이에 告祀를 行하기도 한다. 그러고 部落的으로는 三年마다(卽 隔年) 一次씩 部落的 祭禮(洞內굿 또는 單히 長栍굿이라고도 한다)를 四五月頃에 吉日을 澤하야 한다. 그때는 洞內의 단골무당이 主祭者가 되고 境遇에 依하여는 他洞의 巫女도 請來하야 장승굿을 行한다. 이 굿은 可及的 盛大히 行하며 그 費用은 洞民 等의 隨意 出捐에 依하야 辦出된다. 醵出金이 적으면 굿의 規模도 적어지는 것이오 많으면 盛大이 되는 것이나 要컨대 部落 全體가 모든 惡鬼며 災禍로부터 免하야 泰平하게 하여 달나는 意味에서 行하는 바이오 規模가 클사록 神의 기뿜이 커서 效果도 크다고 한다. 이러한 祭禮時는 洞民 中에서 有司가 各各 選擧되여 收金 祭物 其他의 準備를 하며 祭禮 當日은 諸有司는 勿論 洞中의 男女老少가 集合하여 그것을 叅觀하며 隣里사람까지는 自由로 來觀할 수 있다.

무릇 祭禮는 그 何者임을 莫論하고 반다시 먼저 洞內 都堂에 가서 굿을 行하나니 이것은 都堂神(都堂마누라 又는 도당할머니라고 하며 巫의 말에 依하면 赤철육을 닙고 大빗갓을 쓴 점잖은 男栍이다)이 洞內 諸神의 首位에 있고 全 洞里의 神事를 統轄하는 까닭이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都堂神에게 이로부터 무슨 祭禮를 行하겠다고 먼저 報告하야 그 許可를 얻는 形式이다. 그러므로 장승굿을 行할 때에도 順序를 取하나 그 主로 祭하는 神은 長栍이므로 祭物은 都堂에 略少하고 長栍에 豊富한 것이다. 그러고 한 洞里의 長栍에 있었어도 洞前 入口의 長栍은 洞後 入口의 그것보다 貴하므로 都堂에 告한 다음에는 먼저 洞前의 長栍을 祭하고 그 다음에 다시 洞後의 그것을 祭한다.(松隅里의 都堂神은 洞後 小丘上에 있는 참나무 古樹이오 祭禮時는 그 神體에 검줄을 돌녀친다)

 

△ 포천 송우리 장승 두울_출처: ≪朝光≫

 

3. 建立時의 諸般行事

 

한번 建立한 長栍이 年久 杇敗하면 洞民은 다시 새로운 長栍을 建立하고 腐敗된 者는 燒棄하는 법이나 可及的은 原來의 位置에 그대로 放置한다. 그러므로 그 數는 歲月을 따라 增加되는 것이다 그런대 새로운 長栍을 建立코저 할 때에는 洞民(男子) 十數人 或은 數十人이 合議하야 먼저 適當한 木材를 求하려 松林의 盛한 山을 擇하야 그리로 드러간다.

木材는 반다시 松木임을 要하므로써이다. 入山者들은 山에 드러가자말자 그럴 듯한 聖木을 擇하야 그 樹枝上에 갖어갔든 乾明太魚 一尾를 斜懸하고 樹下에 濁酒 一杯를 밫인 다음에 그 聖樹에 向하야 없디려 來由를 告하고 좋은 松木을 指示하여 줍시사고 祈禱한다. 그 聖木을 山神나무라고 하며 그것을 곳 山神이라고 생각한다. 그 山中의 모든 것은 山神의 所有인 까닭이므로써이다. 그렇게 祈禱를 畢한 뒤 그들은 濁酒를 樹下에 注獻하고 全山을 遍踏하면서 굽고도 妙한 適宜한 松木을 選擇하여 두고 下山하야 山主에게 그 所有의 目的을 말하고 材木의 代金을 問議한다. 이렇게 選擇된 材木은 비록 山主라도 그것을 팔지 않겠다고 拒絶하기 不可能하며 또 그 代價에 對하야도 雙方이 서로 왜누리도 못하는 法이므로 要求하는 額을 卽時로 支給하고 다시 山으로 드러가 그것을 採伐하야 갖고 온다. 그 採伐 運搬하는 동안 그들은 絶對 勤愼의 態度를 取하며 이것을 彫像者에게 넘기어 주면 彫像者(洞中에서 經驗 있는 자를 擇한다)는 그때로부터 造工이 畢할 때까지 沐浴을 하야 몸을 淨潔히 하며 言行을 勤愼하고 房事를 禁하고 飮酒를 禁한다. 그러고 오즉 敬虔한 마음으로 工役에 專心할 뿐이다. 그러나 食肉은 關係치 않다.

長栍建立期는 大槪 四五月(陰曆임은 勿論) 頃으로 이렇게 工役을 맟이면 吉日을 擇하야 長栍建立祭(亦云 장승굿)을 行한다. 그 祭酒는 반다시 濁酒이며 祭器는 古器임을 要하고 祭物은 飯騈果肉 等이나 普通 全猪를 蒸獻한다. 祭時에 먼저 都堂에 告祭하는 것은 前述한 바와 같고 建立 順序는 먼저 男栍을 세우고 다음에 女栍을 세우며 主祭者는 단골巫女이오 洞內 有司들이 諸般으로 使役에 從事하고 洞內는 勿論 外村 男女까지 自由로 叅觀할 수 있는 것도 前述한 長栍굿의 境遇와 조곰도 틀림이 없다. 巫女는 이 새로운 神에 向하야 지금부터 이 洞里를 守護하여 安遇泰平케 하여 달나는 意味의 굿을 行할씨 勿論이나 이 新立의 長栍을 祭하기 前에 먼저 舊來의 長栍에 向하야 新栍의 建立을 告하는 法이다.(松隅里 區長 及 巫女 李景來(六十一歲) 談話)

 

孫晋泰 1936 <拘川松隅里長栍調査記: 松隅里의 長栍 及 그 名稱 信仰과 祭禮-建立時의 諸般行事> ≪朝光≫2-2, 朝鮮日報社出版部, 246∼249쪽, 252쪽.

 

△ 포천 송우리 장승 세엣_출처: ≪朝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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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고리아이 2010/09/10 17:41 # 답글

    오늘날 포천에서 장승과 관련한 지명은
    선단 4통, 중문의대 입구의 '장승거리'와
    창수면 가양리의 '장승거리'가 있다
    그렇다면 남창 선생이 답사한
    송우리 장승은 지명에서조차 잊혀진 듯한 느낌을 받는다.
  • 고리아이 2010/09/26 10:22 # 답글

    소흘면 이동교3리에서 7월 장승제가 베풀어지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단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1998 ≪포천군의 역사와 문화유적≫, 단국대출판부, 327쪽. 다만, 이에 대한 자세한 정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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