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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이 기억하고 있는 일제 침략 백두산 이야기

베트남이 프랑스의 식민지로 있을 무렵인 1940년 초에 일제는 진주만 공격 이후 베트남을 포함한 인도차이나 점령을 계획하고 프랑스 식민 정부와의 협약을 통해 합법적(?)으로 인도차이나를 침공하였는데, 1945년 히로히토 천황의 항복 때까지 베트남에서의 인적 물적 자원을 수탈해갔고, 이에 베트남인들을 저항의 깃발을 다시 한 번 높이 들었다. 이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기억을 베트남 고등학교 역사교과서 일부에서 뽑아 소개한다.


1940년 6월 18일에 일본은 프랑스 장관에게 베트남ㆍ중국 국경을 폐쇄하고 장제스 정권에게 기름과 전쟁 수단_물자_을 공급하는 것을 중지해 달라고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1940년 8월 2일 일본군은 중국 남부를 공격하고자 프랑스에게 비행장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1940년 8월 30일에는 일본과 프랑스 사이에 도쿄 정치 협정이 체결되었는데 협정 내용에서 프랑스는 일본의 요구를 대부분 받아들였다.

인도차이나의 프랑스 식민 정권이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인 협정을 체결하자 1940년 9월 23일 일본군은 북베트남 국경을 거쳐 랑 썬 성을 점령하고 하이퐁 시에 폭탄을 투하했다. 공격을 받은 지방 혁명 정권들은 인민들에게 침략군과 전투를 치르고자 무기를 들라고 지휘했다. 베트남인의 혁명 정신이 높아지는 것을 보고 당황한 프랑스와 일본군은 베트남인의 혁명 운동을 탄압하고자 손을 잡았다. 일본군은 인도차이나 북쪽에 들어간 뒤 프랑스가 일본에게 협조한다는 협정을 강압적으로 체결했다…….

인도차이나 전쟁을 시작했을 때부터 일본은 운송이 아주 중요했다. 일본은 프랑스에게 인도차이나에서 운행하는 모든 교통수단을 다 사용할 수 있도록 요구했다……. 일본군은 군부대를 짓고자 인도차이나 농부의 논밭을 빼앗았고 농부들에게는 벼, 옥수수 대신에 전쟁에 필요한 황마, 아주까리 등을 억지로 재배하게 했다. 인도차이나의 중요한 수출품인 석탄, 철, 아연, 고무, 시멘트 등은 대부분 일본으로 가져갔다. 일본은 국제 시장 가격보다 훨씬 싸게 인도차이나의 인회석, 카페 등을 구입했다.

군사 부문에서는 1941년 7월 29일 협정을 통해 일본군은 인도차이나에서 아무 제한 없이 병력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정치와 사상 부문에서 일본군은 인도차이나를 점령하면서 인도차이나를 지배하고 있던 프랑스 식민 정권을 제거하지 않았다. 일본은 인도차이나 혁명운동을 탄압하고, 노동력을 착취하고, 재산을 빼앗으면서 인도차이나 침략에 대한 비난을 피하고자 프랑스 식민 정권을 이용했다…….

1945년에 태평양 전쟁에서 위기를 느낀 일본은 인도차이나에 있는 프랑스 식민 정권을 정복했다. 1945년 3월 9일부터 일본군은 인도차이나를 독점했다. 그때부터 일본군이 인도차이나 인민들의 주요한 적군이 되었다.

일본은 베트남이 정치부문에서 독립하였다고 선포했지만 실제로는 프랑스 식민 지배 기구를 그대로 남긴 채 총독 등 지배자들만 바꿨다. 일본은 베트남에 트란 쩐 쫑 킴 꼭두각시 정부와 반동 조직과 당파들을 세웠다. 일본은 베트남 청년들과 학생들을 속이고 베트남 인민들이 일본을 두렵게 여기고 복종하도록 만들고자 선전하고 신문 기사를 실었다. 그와 동시에 일본은 베트남의 혁명 근거지들을 공격하려고 군대를 동원했다. 그리고 일본군은 베트남 민간인들을 잔인하게 죽였다.

경제 부문에서 일본은 인도차이나 인민의 재산을 빼앗고 프랑스의 기업체들을 차지하고 시장에서 원료, 물건, 식량을 약탈하려는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수없이 많은 지폐를 발행했다. 이 때문에 인도차이나 인민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1945년 초에 베트남 인민은 기근으로 200만 명이 죽었다. 고통 받던 인도차이나 인민은 일본군을 격퇴하는 운동을 벌였다…….

1945년 8월 14일에 아시아에서 일본 파시스트군도 무기를 버리고 연합군에게 항복했다. 인도차이나를 차지하고 있던 일본군은 아주 두려워졌다. 베트남 혁명 정권은 일본ㆍ프랑스군을 격퇴하고자 8월 혁명운동을 벌였고 베트남 인민이 무기를 들고 일어섰다. 그 결과 2주일 뒤에 베트남 인민은 대승리를 거두어 프랑스군과 일본군의 통치에서 벗어났다.


강혁ㆍNay Tun Naing 2009 ≪아시아는 일본의 만행을 결코 잊지 않는다≫, 황금나무, 213∼216쪽. 




덧글

  • 초효 2010/08/21 16:56 # 답글

    저러고 사과 한 마디 안 한 놈들이 한국군의 월남전 때 일을 갖고 물고 늘어지니...
  • 고리아이 2010/08/21 17:29 #

    그래도 대승적으로 볼 때, 우리가 먼저 베트남에게 손을 내밀어
    사과할 것은 사과하고, 경제적인 이익을 함께 나누는 것이 좋을 듯해요
    어차피 일본이야 일본이 알아서 할 문제니까요
  • ㅊㅌㅍ 2010/08/22 09:18 # 삭제

    일제가 이길때 고무공 받고 기뻐하던 사람들의 후손이 이런 말해도 별 설득력 없어요
  • 고리아이 2010/08/22 12:32 #

    일본군이 베트남을 침공할 때에는
    프랑스에서 해방시켜준다는
    <해방군>이라고 선전했지요
    우리나라도 1945년 소련군은 <해방군>, 미군은 <점령군>이라고
    공식 선전하였지요
  • 초효 2010/08/22 16:25 #

    DJ옹이 베트남에 가서 사과를 했죠. 한국기업들이 베트남에 많이 진출했고, 댐이나 도로같은 인프라도 무상으로 건설해 주고 있는 걸로 압니다.
  • 고리아이 2010/08/23 00:22 #

    작년에 쥐새끼땜에
    베트남과의 관계가 험악해질 뻔 했지영
    http://coreai84.egloos.com/tb/10195177
  • 앨런비 2010/08/21 17:06 # 답글

    200만이 사망한 대기근은 수탈문제가 제1원인이지만, 전쟁으로 인한 수송수단의 부족, 특히 미군의 잠수함 작전의 성과가 크게 나타났습니다. 물론, 쌀이 정상유통되었다면 그만큼 더 뜯어갔을 것이라는게 다들 하는 추정이지만(....)
  • 고리아이 2010/08/21 17:33 #

    베트남 역사 교과서를 보면서 느낀 점이랄까, 아직은 구체적인 사례를 중심으로 하기보다는_이 점에서는 조선과 중국, 그리고 일본 교과서를 따라가기가 힘들죠. 틈을 내어 이들 교과서의 내용도 소개하도록 할게요. 님의 지적처럼 미군의 잠수함 작전은 서술을 아예 하지 않았으니까요_개괄적인 서술이 강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님의 지적대로 1945년 대기근이 대풍년으로 바뀌었으면 분명 일제가 조선에서 수탈한 것처럼 베트남에서도 아주 넉넉하게(!) 수탈해 갔겠지요.
  • 에드워디안 2010/09/01 19:55 # 답글

    프랑스나 일본이나... 베트남 민중 입장에선 그 나물의 그 밥이었겠죠.

    PS. 프랑스 식민지시대의 베트남에선 당시 세계적으로 가장 열악한 강제노동이 시행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하노이와 사이공을 잇는 '인도차이나 횡단철도'의 부설 와중에 엄청난 인명이 희생당했다고 하네요. 게다가 총독부의 수입을 늘리기 위해 농민들에게 술과 아편의 소비를 강요하는 바람에(프랑스인 관리가 일일이 농촌 마을을 방문해 술과 아편 소비의 할당량까지 제정할 정도였음), 베트남 농촌사회가 거의 붕괴 직전까지 갔다고 합니다. 약식 처형(기요틴을 통한)도 수시로 있었고... 아무튼, 그 쪽도 우리 못지 않은 비극의 역사를 겪었습니다.
  • 고리아이 2010/09/02 12:03 #

    베트남의 프랑스 식민지시기의 어려운 부분을 소개해주셨네요
    고맙습니다
    꾸우벅^_^))
  • 에드워디안 2010/09/01 19:57 # 답글

    다소 엉뚱한 생각이긴 하지만 만약 프랑스가 나치로부터 해방되지 못했다면, 베트남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 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 고리아이 2010/09/02 12:05 #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지시기 때에도 해방을 위한 투쟁을 하였고
    일제 강점기에도 해방을 위한 투쟁을 하였다가,
    1945년 8월에 자신들만의 정부를 수립하기도 했지요
    다만, 그곳에 미국과 프랑스가 개입하는 바람에 분단이 되었고요

    아마도 일제와의 투쟁으로 점철되지 않았을까요???

  • 에드워디안 2010/09/02 12:24 #

    미국이 인도차이나에 개입한 것은 현지 사정에 무지했던 점이 한 몫 했지요. 사실 호치민도 본래 미국에 접근하여 중공을 견제하려는 구상을 가졌던 만큼, '아시아의 티토'로 활용할 수 있었다는 주장이 적지 않죠. 근년에 타개한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도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무지에서 비롯되었다고 토로한 바 있고...
  • 고리아이 2010/09/02 20:42 #

    2차 대전이후
    미국은 지구의 경찰을 자처하면서
    민족국가들의 제 갈길을 간섭하면서
    전쟁과 학살을 멈추지 않았지요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을 비롯하여
    제1차 이라크침공_페르시아만 전쟁 또는 걸프전_과
    아프가니스탄 침공, 그리고 최근 제2차 이라크침공까지
    뒷날 미국 국방장관_맥나마라와 같은_이 나와
    <미국의 무지>를 또 다시 언급한다면
    그야말로 안습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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