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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자신을 직시해야 할 때_김인걸 Corean Thought Clio

탈근대 담론의 홍수 속에서 서구 중심주의적 사고방식, 근대주의적 인식 틀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높다. 계몽주의에 바탕을 둔 도구적 이성을 맹신하며 달려온 근대 서구사회가 야기한 폐단을 치유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아시아적 가치에 주목하는 흐름도 늘었다. 이 같은 현상은 서구와 길을 달리해온 한국인의 처지에서 보아 일단 반가운 일이라 하겠다. 자주적 근대국가 수립에 실패하고 일제 식민지배의 유산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걸어온 길마저 제대로 찾을 수 없었던 역사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근대’를 넘어 새로운 길을 찾아나서는 여정에서 우리가 선택한 방향이나 임하는 자세는 과연 제대로 된 것인가? 우리는 탈근대 담론에 편승하여 근대 극복을 운위하고 있지만 그 주체를 세우는데 장애를 겪고 있으며, 아시아적 가치를 논하지만 정작 한국적 가치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을 들라 하면 망연해지기 일쑤이다. 한국사, 한국문화가 나름의 개성을 가지고 발전되어 왔음을 강조하는 것을 국수주의적이라고 매도하는 일도 흔치 않게 되었지만, 기실 그 주장자들의 한국문화 인식은 거의 무지에 가깝고, 있다고 해도 과거 일제가 심어놓은 것과 큰 차이가 없는 듯하다. 이는 한국이 걸어온 길에 대해 알 필요를 느끼지 않았고, 그런 것을 몰라도 사는 데 큰 지장이 없는 문화풍토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신채호가 조선 지식인들의 노예적 관념주의에 곡하면서,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낭객(浪客)의 신년만필(新年漫筆)〉1925)고 탄식하였던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국 학문사상의 식민지성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은 일제 식민지배를 거치면서였다. 근대 학문이 자리 잡아 자신의 전통문화를 체계적으로 재정립해야 할 시기에 국망을 당하자, 일제는 한국인들의 자의식을 말살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한국문화를 왜곡 선전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역사전쟁’을 치르고 있는 데서도 드러나듯 왜곡은 역사부문에서 특히 현저하였다. 일제가 한국사 인식에 끼친 해악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1960년대 이후 한국사 연구는 식민사관의 타율성론과 정체성론을 비판하고 한국사가 주체적 계기에서 발전되어 왔음을 밝히는데 매진해 왔다. 이 같은 흐름을 ‘내재적 발전론’이라 칭한다. 그런데 80년대에 접어들면서 경제사학계 일각에서는 국사학계의 그간 노력을 ‘자본주의맹아론’ 정도로 폄하하고, 서구의 역사경험에서 나온 ‘역사발전법칙’을 한국사에 적용하려는 도식적인 행태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내재적 발전론을 비판하는 측에서 주요 근거로 삼는 것은 일본으로부터 수입된 ‘소농사회론’과 그 근대편의 짝이라 할 ‘중진자본주의론’ 등이었다. 그리고 이는 서구로부터 수입된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나온 것이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이다. 식민지근대화론은 남한 자본주의의 성공이 일제 식민지기에 그 기초가 마련되었다는 것으로서, 이론적인 면에서나 실천적인 면에서 그 의의를 발견하기가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다. 우선 이 논리는 조선후기 사회발전을 높이 평가해 온 1960년대 이래의 국사학계의 성과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그간 한국사학계의 성과를 자본주의맹아론이라고 하는 자신의 눈높이로 끌어내려 재단한다. 이 같은 시각을 교정하지 않는 한 연구 성과가 제대로 안중에 들어올 리 없고 사실을 사실대로 읽어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이 주장은 한국 사회의 상대적 ‘성공’과 현실 사회주의권의 동요라는 현실에 고무되어 얼굴을 내밀게 된 것인데, 이러한 결과론적 이해로는 새로운 사회를 전망할 수 없다. 자신이 가야할 길을 주체적으로 찾는다는 것은 현실에 대한 비판적 안목 위에서 가능한 것인데, 그 안목은 자신의 문화에 대한 신뢰 없이는 갖추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간 한국사 연구는 가능한 한국사를 발전적으로 보고, 한국사의 개성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추었던 것이 사실이다. 식민사관의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을 크게 의식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조선후기 사회가 이루어온 성과가 어느 한 각도에서 일도양단될 수 있는 그러한 만만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임진, 병자의 난을 겪은 후 조선은 자신의 모습을 새롭게 보지 않을 수 없었고, 그 반성 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자국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회복할 수 있었다. 국왕 영조가, “우리나라는 중국(中國)과 달라서 비록 한ㆍ당(漢唐)의 위세를 가지고도 땅을 빼앗거나 나라를 바꿀 수 없었고, 조선 안에서 스스로 서로 교대해 오늘에 이르렀으니, 3백년 종사의 맡김이 내 한 몸에 달려있다.”라고 자부한 것이나, 정조가 당시 청나라로부터 들어오는 문물을 분별없이 따르는 사대부사회의 풍조에 못마땅해 하면서, “이미 우리 동국(東國)에서 태어났으면 마땅히 동국의 본색을 지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던 것은 그 결과였다. 일련의 탕평정국 하에서 사대부의 위상이 변화를 강요받게 되고, 민(民)의 지위도 일정하게 상승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조선후기 어디까지나 보호의 대상이었던 민의 동향에 대한 지배층 일반의 인식이 역사적 현실과 크게 괴리되기 시작하였다. 정조는 조선에서 농민봉기가 없었던 것은 사대부의 힘 때문이라고 강조하였다. 정조가, “우리 조정이 사대부(士大夫)로 나라를 세운 것은 세도(世道)를 유지하며 사람의 뜻을 막아 지키려는 것이었다. (중략) 수백 년 이래로 농사짓는 백성들이 야위고 괴로워서 병장기를 들고 울부짖으며 시끄럽게 떠드는 변란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은 사대부의 힘이다.”(《일득록(日得錄)》〈훈어(訓語)〉)라고 하였던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정조 사후 10년이 못가 황해도 곡산에서 민란이 터지고, 곧이어 ‘홍경래 난’이 일어났다. 정조는 백성들의 살림살이를 무엇보다 앞서 걱정하였지만 정작 민의 새로운 동향을 읽어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 같은 정조의 인식은 그가 키운 대신의 입에서도 이어지는데, 1809년 국정의 최정상에서 어린 국왕을 보좌하던 김재찬은 민생이 백척간두에 서 있다면서 “중국의 걸대지민(桀大之民)같았으면 금일과 같은 위급한 때 반드시 어떤 사변을 면치 못했을 것”이라고 한바 있었지만, 그가 민원의 근원이라고 보았던 수령의 탐풍(貪風) 해소를 위해 내놓았던 방안은, ‘옛날 한나라에서는 허리를 꺾었고 황조[明]에서는 40관 이상 도적질한 자는 참수하는 법을 두었으며, 국조(國朝)에서는 자손을 청현직에 오르지 못하게 하였다.’는 점을 들어, 어사를 파견, 발각된 자의 경우 그 자손을 ‘5대 동안 청현직에 올리지 말자[五世勿許淸顯]’는 것이었다.


어느 시기도 마찬가지겠지만 조선후기는 역동적인 시대였다. 사회경제적 변동에 따른 기존 지배층의 분열과 과거 지배체제에서 소외되었던 ‘민’의 성장이 이루어지면서 나타나는 여러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사회세력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는 점에서, 구지배층의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혼란기였지만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층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기회의 시기이기도 하였다. 조선의 ‘민중’은 ‘걸대한’ 중국 민중과는 달리 대규모의 항쟁을 통해 왕조를 교체하는 데까지 이르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이는 좁은 땅덩어리 안에 지배층의 지배력이 촘촘히 미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군주와 사대부가 상호 길항관계를 맺고 민을 보호ㆍ지배하는 지배층의 존재형태가 중국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었던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1862년 군현단위의 항쟁을 거친 후 30년 뒤, 동학군은 자신들이 세운 군율(軍律)에서, “효제충신(孝悌忠臣)이 사는 마을의 경우 10리 안에는 주둔하지 않는다”(《동비토록(東匪討錄)》)는 성숙한 의식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자신의 역사보다 ‘선진’사회의 역사와 새로운 문화풍토에 더 관심을 쏟는 것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닌 모양이어서, 정약용도 아들에게 주는 편지에서 우리나라의 문학을 배척하여 선현들의 문집을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는 당시 풍조를 큰 문제로 삼고, “사대부집 자제로서 국조고사(國朝故事)와 선배들의 의론을 모른다면 고금을 꿰뚫는 학문을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이는 노망과 같다”고 지적한바 있다. 우리는 선진사회의 여러 학문적 성과를 이해하고 흡수하는데 결코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지만, 우리 자신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도 균형 잡힌 시각을 견지해야 한다. 자기비판은 자기 문화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을 때 의미 있는 비판이 될 수 있고, 무엇보다 건강한 현대 문화를 건설하려는 실천적 활동이 뒷받침되어야 비판의 의미가 살 수 있다. 그리고 그 믿음과 비판은 자신의 문화를 바로 알고자 하는 ‘현실’적 요구와 결합해야 미래 문화 건설의 동력이 될 수 있다. 모든 편견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의 모습을 ‘역사적으로’ 직시할 때이다.


글쓴이 / 김인걸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 주요저서
 조선시기 사회사 연구법,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3
 20세기 역사학, 21세기 역사학, 역사비평사, 2000
 조선의 정치와 사회, 집문당, 2002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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