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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경연의 자연재해 이해_권연웅 Corean Clio

조선시대의 군주는 정치의 중심이었으므로, 군주의 생각과 행동은 정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당시 지배층은 군주의 언행을 통제하고자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 경연과 대간과 사관을 들 수 있다. 경연은 교육의 장을 통하여 임금의 생각과 행동을 사전에 규제하려는 장치였고, 대간은 사후에 임금의 잘못을 따져서 고치려는 장치였으며, 사관은 임금의 언행을 현장에서 기록하여 후대의 심판을 받게 하는 제도였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유교 정치사상의 산물로서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예를 들어 경연관이 임금에게 강의하는 자리에 대간이 참석하여 임금의 잘못을 따졌으며, 사관은 강의와 간쟁의 내용과 임금의 말을 자세히 기록했다. 이렇게 볼 때 경연은 왕권 행사를 규제하는 제도적 장치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경연에서 경서의 경우에는 자구에 대한 주석까지 정독한데 비해, ≪자치통감≫과 ≪자치통감강목≫과 같은 사서의 경우에는 내용을 통독하면서 특히 교훈이 될 만한 대목만 부연하여 설명했다. 그러나 성현의 가르침을 설명할 때는 역사에서 실례를 인용하고 역사를 공부할 때는 이를 성현의 교훈에 비추어 설명했다. 따라서 경연 강의는 언제나 임금이 정치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로 귀결하였다. 본디 경연이 왕권을 제약하고자 한 제도였던 만큼, 경연 강의는 항상 왕권의 제약을 뒷받침하는 논의로 일관하였다. 따라서 당시 자연 환경의 변화에 따른 자연 재해에 대한 이해_재이론災異論_ 또한 모두 왕권의 제약이라는 목표로 귀일한다.

조선 전기 경연관들의 재이론을 검토하면 몇 가지 특징이 나타난다. 첫째는 재이론의 양면성이다. 본디 재이론은 군주의 잘잘못에 대하여 하늘이 칭찬과 견책의 뜻을 상서와 재이로 나타낸다는 이론으로, 왕권을 강화하는 일면과 이를 제약하는 일면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군주가 천명을 받은 하늘의 대행자로서 백성의 안녕뿐만 아니라 천지의 조화까지 책임을 갖게 된 것은 대단한 격상이었다. 반면에 군주가 그 허다한 천재지변에 대하여 모든 책임을 지게 되었으므로, 재이론은 임금에게 매우 불리한 이론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재이와 상서의 양면 가운데 어느 쪽이 강조되느냐 하는 것은 왕권과 신권의 함수 관계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었다.

둘째는 재이론의 편중성이다. 조선시대의 경연관들은 재이를 극도로 중시한 반면에 상서는 극도로 경시했다. 해마다 반복되는 가뭄과 홍수는 물론이요, 규칙적으로 생기는 일식과 월식 그리고 이따금 생기는 이상기후, 혜성, 화재 등 모든 재이는 임금이 정치를 잘못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경연관들은 무슨 잘못이 어떤 이변을 가져왔는지 설명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어떤 천재지변이 일어나든지 임금의 자기의 정치 전반을 반성하여 스스로 잘못을 찾아야 했으며, 관료들은 정치 전반을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었다. 반면에 경연관들은 상서의 존재를 사실상 부인했으며, 임금에게도 상서를 무시하고 자기기만에 빠지지 말라고 가르쳤다. 곧 재이론의 양면 가운데 왕권을 제약하는 일면 만을 강조한 것이다. 경연 강의의 목적이 왕권의 제약임을 생각하면, 이러한 편중은 너무나 당연했다.

셋째는 재이론의 허구성이다. 가뭄과 홍수는 거의 해마다 있는 일이고, 일식과 월식은 주기적인 현상이며, 그밖에 혜성, 태풍, 화재 등의 재변도 흔히 있는 일이었다. 일찍이 순자는 음양가의 재이설을 논파한 바 있거니와 한대의 왕충이나 송대의 왕안석 등도 재이가 인사와 아무 상관이 없음을 명백히 지적했다. 조선시대에는 천문학 지식이 더욱 발달했으니, 임금과 경연관들도 재이론의 허구성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재이론을 묵수한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재이론이 천명사상에 근거했기 때문인 듯하다. 재이가 하늘의 힐책 또는 경고라는 생각은 군주가 천명을 받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재이론의 거부는 곧 천명사상의 부정을 뜻했다. 임금이 천명을 부정한다면 왕권의 정통성은 어디서 찾을 것인가? 민의에서 찾겠는가?_민본 사상을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민의에서 찾으려는 노력의 흔적은 보이지 않음이 당시 사회 환경이다_임금은 천명 사상과 함께 재이론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경연관들에게는 재이론이 매우 유용한 무기였던 만큼 그 허구성을 문제삼을 까닭이 없었다.

그리하여 조선시대 경연관들의 재이론은 위에 말한 편중성과 허구성의 양면성에도 수백년 동안 고수되었으며, 왕권을 제약하는 이론적 무기로써의 역할을 담당했다. 물론 재이론은 경연 강의의 기조를 이루는 다른 이론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었기 때문에 보다 큰 효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 특히 간쟁론과 관계가 밀접했다. 천재지변이 발생하면 임금은 근신하고 반성하는 뜻에서 정전을 피하고, 음식을 줄이며, 죄수를 방면하고 구언求言을 했다. 그 가운데 구언은 임금이 관료들에게 비판을 구하는 것인데, 이때는 관료들이 아무리 심한 말을 해도 이를 용납해야 했다. 따라서 재이는 언제나 간쟁권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재이론은 절검론節儉論과 군자소인론君子小人論 등 경연 강의가 다른 주제들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이들이 모두 왕권을 제약하는 이론인 만큼 이들의 상호관련은 당연한 것이었다.

 

權延雄 1990 <朝鮮前期 經筵의 災異論> ≪歷史敎育論集≫13ㆍ14, 歷史敎育學會, 597∼6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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