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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태종대 경연_남지대 Corean Clio

태조 재위시 유경ㆍ유관ㆍ한상경 등으로 하여금 ≪대학연의≫를 진강하게 한 적은 있으나 제도화된 경연을 열지는 않았다(1392년 9월 이후 아홉 차례 정도). 그리하여 간관의 여러 차례 상소가 있었지만, 결국 개연되는데 이르지는 못하였다. 이는 태조 자신의 말대로 머리가 이미 희어져 제유를 모아 청강할 필요가 없었던 데에도 기인하겠으나(1392년 11월), 당시 안정되지 않은 정치적 상황과도 일정한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_태조는 고려조에서 신하들과 같은 반열에 섰던 점에서 권위상의 문제점을 생각할 수 있고, 사병의 온존 등의 정치적인 불안정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정종은 즉위 초부터 경연에 관심을 보여 즉위한 그 달부터 이첨ㆍ조용에게 경사에서 군심ㆍ정치에 관계있는 것을 자세히 요약하여 지어 올리도록 하였고, 또 지경연사 하윤 등으로 하여금 사서를 점절하여 올리게 하였으며, 이어 경연에서 ≪정관정요≫를 강하였다. 그 뒤 개정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10여 차례에 걸쳐 ≪논어절요≫를 강하였다. 이때에 비로소 조선조에서의 경연다운 경연이 열리기 시작하엿으며, 이어 사관이 경연에 참여하게 되었다. 정종은 개성으로 천도한 뒤에도 ≪통감촬요≫ㆍ≪통감강목≫ 등을 강론했는데, 이때의 경연에서는 주로 군도에 대한 진언이 있었다. 그런데 정종 2년 10월에 임금이 경연에서 노자와 신선의 도를 묻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정종의 관심이 정치에서 떠나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태종은 즉위초에 경연을 열어 ≪대학연의≫를 강했으며, 또 경연에 간관을 참여하게 하고, 정치적인 사항을 논의함으로써, 경연에 관심을 갖는 듯하였으나 제도적이고 의례적인 경연을 꺼려 점차 열지 않았다. 그리하여 태종 6년 5월 이후에는 사실상 정연되었다.

이 시기 경연은 고려 말에 자리잡히기 시작했던 경연 제도가 큰 변화없이 조선으로 이어졌다는 특징을 지닌다. 곧 정종대에는 고려 이래 집현전을 활성화하려는 노력이 있었으나 무위로 끝나고 말았으며, 태종대에는 임금이 경연을 자신의 호학을 과시하는 방편 정도로 생각했을 뿐이어서 경연이 제도적으로 더욱 정비되지 못하였으며 기능면에서도 뚜렷한 성격을 지니지 못하였다. 단, 정종대에 참여하기 시작한 사관과 태종대에 참여하기 시작한 간관이 이후에는 관례로서 참여하게 되어 그 뒤 경연 발달과 기능 강화에 한 단서를 이루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하겠다.

이 시기 경연에서 논의된 사항은 경향성을 파악하기 어렵지만, 정종대에는 신의 입장에서 군도가 강조되었고, 태종대에는 임금의 권위를 높이는 방향으로 기능한 면도 있었다_태종대에는 강론이 끝난 뒤에 사주(賜酒)ㆍ사연(賜宴)하는 예가 상당히 많은 것, 강서를 다 읽게 되자 군신이 진하하려 한 것 등은 경연의 의례적인 일면을 나타내는 것이나 한편 임금의 권위를 높혀주는 방향으로도 기능했다고 볼 수 있다.

 

南智大 1980 <朝鮮初期의 經筵制度: 世宗ㆍ文宗年間을 중심으로> ≪韓國史論≫6,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1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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