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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의 왕권에 대한 세 가지 견해 Corean Clio

이기백 1992 ≪한국사신론 신수판≫, 일조각, 234쪽.

 

태조(1392∼1398)의 군사력은 그가 새로운 왕조를 건설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태조를 뒷받침해 준 사대부들의 힘이 없었던들 그는 왕위를 차지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연유로 해서 건국 초기에는 태조를 추대한 이들 사대부 출신의 개국공신들이 도평의사사라는 회의기관을 중심으로 정치의 실권을 쥐고 있었다. 태조는 다만 도평의사사의 결의를 재가하여 이를 시행케 할 따름이었다. 정치의 실권을 쥔 사대부는 유교적인 이상정치를 표방하여 자신들의 권익을 도모하는 법전을 만들어서 이로써 정치의 기본으로 삼으려 하였다. 정도전이 편찬한 ≪조선경국전≫이라든가, 그가 조준과 함께 위화도회군 이후의 조례를 수집 편찬한 ≪경제육전≫ 같은 것이 그것이었다. 이러한 개국공신들의 정치는 마치 고려 귀족정치의 재현과도 같은 양상을 자아내었다. 이에 위로는 국왕과 밑으로는 다른 많은 사대부들이 불만을 지니지 않을 수 없었다.

 

이존희 1994 <개요> ≪한국사23 : 조선초기의 정치구조≫, 국사편찬위원회, 1∼2쪽.

 

조선왕조는 이와 같이 유교사상을 정치이념으로 내세웠는데, 유교정치의 실현은 정치기구ㆍ통치체제의 정비로써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개국 초에는 정치적ㆍ사회적 안정이 급선무였고, 태조로서도 왕권의 강화가 우선이어서 정치기구ㆍ통치체제를 정비할 여유가 없었다. 도평의사사는 문무고관의 합좌기관이었으나 능률적으로 운영되지 못하였고, 문하부도 정치의 중심기관이 되지 못하였다. 즉 태조대의 정치는 강력한 왕권을 가진 태조와 그의 신임을 받은 조준ㆍ정도전 등 재신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유교정치의 기틀은 아직 확립되지 않았다.

 

국사 편찬 위원회 국정 도서 편찬 위원회 2002 ≪고등학교 국사≫, 97∼98쪽.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고려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새 국가가 하늘의 명을 받고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 세워졌음을 강조하였다. 이에 국호를 조선으로 선포하고, 교통과 국방의 중심지인 한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어 한양에 도성을 쌓고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 종묘, 사직, 관아, 학교, 시장, 도로 등을 설치하여 도읍의 기틀을 다졌다.

건국 초에는 정치적 사회적 안정과 왕권의 안정이 급선무였다. 초창기의 문물 제도를 갖추는 데 크게 공헌한 사람은 정도전이었다. 그는 민본적 통치 규범을 마련하고 재상 중심의 정치를 주장하였다. 또한 불씨잡변을 통하여 불교를 비판하였으며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확립시켰다. 태조 때의 정치는 태조와 그의 신임을 받는 정도전, 조준 등 소수의 재상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 조선 개국 초기 정권이 도평의사사를 중심으로 한 몇몇 개국공신들이 쥐고, 왕권은 약했다는 이해는 일제식민사학의 영향으로 이해하고 있다(최승희 1987 <조선 태조의 왕권과 정치운영> ≪진단학보≫64). 그렇지만, 태조의 강력한 왕권으로 정도전과 조준 등 소수의 개국공신들이 중심이 되었다는 정치 운영 체계는 오히려 개국 초기의 불안한 왕권 자체를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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