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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한 감옥[涼獄]과 따스한 감옥[溫獄] Corean Clio

조선시대에는 온풍기나 냉방기가 있던 것도 아니고, 단지 겨울과 장마철에 겨우 온돌 정도만 있었을 터이지만, 죄수들이 지내던 감옥의 경우는 이보다 더 열악하였겠지요. 게다가 오늘날처럼 죄수들을 위한 최소한의 복지 시설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어요. 그런데, 영특하기로 소문 난 세종은 이를 어떻게 해결하려 했을까요. 아래 기사를 살펴보아요.

 

형조에 전지하였다: 서울과 지방의 옥에 갇힌 죄수들이 여러 번 질병에 걸리는 것은 대개 옥 안이 깨끗하지 못하여 악한 기운이 증발하기 때문에 병이 발생하고, 이내 죽는 자가 생기게 되니, 그 구휼하는 조건을 누차 교지로 내렸건만 사옥관(司獄官)이 이를 하나의 형식적인 문구로만 보고 전혀 봉행하지 않았다. 이후부터는 서울은 사헌부가, 지방에서는 관찰사가 이를 거듭 밝히 살피고 조사하여, 일찍 죽는 환난을 면하게 하라. ; 세종 11년(1429) 2월 8일

 

음력 2월이니까 양력으로 대략 살핀다면, 3월쯤 되겠네요. 겨우내 서울과 지방의 감옥에서 추위와 깨끗하지 못한 환경으로 인해 질병으로 걸려 미결수 또는 죽을죄가 아닌 기결수들이 죽어간 상황에 대해 세종은 서울 감옥의 경우 사헌부, 지방 감옥의 관찰사가 자세히 살필 것을 형조에 문서로써 명령하고 있네요.

이러한 명령이 나오게 된 까닭은 당시 사람들의 생각에는 죄수라 할지언정 그들이 죽을죄가 아닌 다음에야 형기를 마치지 못하고 감옥에서 죽게 되면, 이것이 억울함으로 남아 원한이 맺히게 되고, 이러한 원한이 쌓이면 하늘과 땅_곧, 음과 양_의 어울리고자 하는 기운을 다치게 하여 가뭄과 홍수 따위의 천재지변을 일으킨다는 생각에서 비롯하였지요.

그래서 세종은 형벌은 정치를 돕는 일인 까닭에 예전에 교화가 성하던 시대에도 진실로 없앨 수 없었던 것이라 하면서 역대 중국 왕조와 조선에서 일어난 억울한 죄수들의 죽음에 대해 상세히 정리하면서 억울한 송사와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수사의 엄정함을 강조하고 있지요(세종 13년(1431) 6월 2일). 그런데 당시 죄수들의 ‘억울한 죽음’의 이면에는 수사의 허술함만이 아니라, 바로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을 견디지 못하는 ‘죽음’이 있다는 점이지요. 곧, 세종은 감옥의 열악한 환경이 허술한 수사로 인한 죽음과 함께 죄수들의 ‘억울한 죽음’에 한몫을 더하였다고 여겼어요. 바로 그러한 생각이 아래와 같은 명령으로 이어졌다고 보아요.

 

서울과 지방 감옥의 죄수가 잇따라 폭사하므로 옥관(獄官)이 구료하는데 실수가 있을까 깊이 염려한다. 매양 서울과 지방의 전옥(典獄)하는 관원에게 명령하여 엄격히 고찰(考察)을 하도록 하였으나, 감옥의 죄수로서 죽는 자가 증가되고 줄어들지 아니한다. 내가 생각하건대, 감옥의 죄수가 죽는 것은 오직 고문(拷問)이 너무 심한 때문만이 아니고, 실제로는 감옥이 좁고 막혀서 모진 추위와 무더위의 장맛비에 신고(辛苦)를 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병이 나서 많이 죽게 되어 진실로 불쌍하다. 그러나 혹시 원장(垣墻)이 나지막하고 규찰(糾察)을 허술하게 하면 넘어서 도망하는 자가 역시 적지 않을 것이다. 원장을 널찍하게 쌓고 방옥(房屋)을 수축하고 수목(樹木)을 심어서 모진 추위와 심한 무더위를 임의(任意)대로 지나도록 하고, 또 바깥으로는 가시 수풀을 마련하고 중문(重門)을 굳게 지켜서 넘어가지 못하도록 하라. 이 같은 조건들을 자세하게 모두 빠짐없이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 세종 20년(1438) 12월 18일

 

조선시대에 오늘날처럼 냉ㆍ온방 기구나 구조가 발달하지 않았기도 하지만, 좁고 사방이 막힌 감옥에서 무더위와 장마, 모진 추위를 견뎌내면서 국가에서는 철저하게 소외된 죄수들로서는 가족들의 옥바라지로 연명을 해야만 했지요. 그래서 세종은 감옥 방을 좁고 담을 높게만 하지 말고, 방을 넓게 하면서 담은 넓게 쌓고, 주변에 일반 나무와 함께 가시가 있는 나무도 심어 죄수들의 탈옥을 막는 한편, 감옥 관리 관료들의 허술한 구호와 더위와 추위로 인한 죄수들의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제안하고 있어요. 그런데, 당시 관료들은 이에 대해 그리 깊은 생각을 하지 않은 듯해요. 세종의 제안에 대한 관료들의 생각은 다음과 같지요.

 

이에 의정부에서는 반복하여 자세하게 연구하였으나 다시 다른 조건이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일체 교지에 따라 시행하되 모두 농한기에 폐단 없이 축조하게 하소서. 단 지방 각 고을 옥졸은 대개 천하게 여겨서 빈한한 무리를 시키는 까닭으로 죄수들에게 토색질하여 만단(萬端)으로 침해하므로 굶주리고 추위에 떨게 되어 죽게 됩니다. 그러나 아전들은 보통 일로 여기어서 즉시 고발하지 아니하옵니다. 이제부터는 각 고을 우두머리인 호장(戶長)과 기관(記官)에게 감옥을 관장하는 임무를 으레 겸임시켜서 만일 죄수의 무리 가운데 죽지 않을 사람이 죽는다거나, 또는 원장(垣墻)을 넘어서 도망하는 사람이 있으면 호장과 기관을 먼저 논죄하고, 매양 행대(行臺)에서 사람을 보내어 감옥을 규찰하게 하소서. ; 세종 20년(1438) 12월 18일

 

지방 감옥의 경우 옥졸이라는 직무 자체에 대한 천한 생각과 그에 따른 박한 대우로 인해 죄수들과 옥바라지를 하는 가족들에게 토색질을 한다고 여겨 호장과 기관에게 관리 감독을 맡기고 행대에서 관리를 파견하자는 ‘옥상옥’의 의견을 제시할 뿐, 세종의 제안에 대해서는 농번기를 피해 농한기에 감옥의 방과 담을 수리하자는 정도에 그치고 있어요. 그런데, 이듬해 아주 산뜻한 보고서가 올라오고 있네요. 관료들이 많은 고민을 한 흔적이 보이네요.

 

의정부에서 형조의 첩정에 따라 보고하였다: 무릇 서울과 지방의 옥(獄)에 높은 대(臺)를 쌓고, 서늘한 옥 3간을 그 위에 짓되 문과 벽은 모두 두꺼운 판자(板子)를 쓰고, 바깥벽에는 틈과 구멍을 내어서 바람 기운을 통하게 하소서. 또 남성의 옥 4간과 여성의 옥 2간을 지어 각기 경한 죄와 중한 죄를 분간하게 하되, 모두 판자를 깔고 처마 밖에는 4면으로 채양을 만들어 죄수들로 하여금 더운 때에는 형편에 따라 앉고 눕게 하고, 밤이면 도로 옥으로 들여오고 자물쇠로 채우게 하소서. 또 따뜻한 옥을 짓되, 그 남녀와 경중(輕重)의 옥 수효는 서늘한 옥과 같이 모두 토벽(土壁)으로 쌓고, 그 바깥 4면에는 정목(棖木) 다섯줄을 심어서 그것이 무성하기를 기다려 문을 만들어 열고 닫게 하고, 아직 무성하기 전에는 우선 녹각(鹿角)을 설치하게 하며, 평안도ㆍ함길도 같은 곳은 토질이 정목은 마땅치 아니하니 가시나무[棘木]를 심게 하되, 두 옥의 거리와 사면 원장의 거리라든가 넓고 좁은 것은 땅의 형편에 따를 것이지만, 요컨대, 죄수들이 넘어가지 못하게 하소서. 이 도면과 설계를 각도에 반포하여 관찰사로 하여금 도면에 따라 형편을 짐작하여 점차로 축조하게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당초에 임금이 서울과 지방의 죄수들을 형벌 맡은 관리들이 구호하는 데에 실수하여 죽게 될까 염려하여 의정부에 하교하여 옥을 쌓고 죄수를 구휼하는 방책을 의논하게 하였다. 정부에서 의안을 꾸며 보고하였더니 임금이 그 의논대로 따르기로 하고, 이날에 와서 이런 법령을 세웠다. ; 세종 84권, 21년(1439) 2월 2일(신해)

 

 

△ 시원한 감옥과 따스한 감옥
_조선왕조실록 누리집(http://sillok.history.go.kr/)에서 얻음

 

먼저 감옥을 대 위에 세워 지면에서 떨어뜨려 높게 짓자고 하네요. 그런 뒤 서늘한 감옥 세 칸을 그 위에 만드는데 문과 벽은 모두 두꺼운 판자를 쓰고, 바깥벽에는 틈과 구멍을 내어서 바람 기운을 통하도록 만들자고 하고 있어요. 또한 이 서늘한 감옥에는 남성 죄수를 위한 감옥 네 칸과 여성 죄수를 위한 감옥 두 칸을 만들어 각기 가벼운 죄수와 무거운 죄수를 나누어 가두어 두면서 모두 판자를 깔고 처마 밖에는 네 면으로 햇빛 가리개를 만들어 죄수들로 하여금 더운 때에는 형편에 따라 앉고 눕게 하고, 밤이면 도로 감옥으로 들여오게 하자고 하네요.

이어 따뜻한 감옥은 서늘한 감옥과 같이 대 위에 세운 뒤 두꺼운 흙벽으로 방을 만들고, 바깥담장으로 정목을 다섯줄을 심어 키우는데, 정목이 자라기 전까지는 녹각을 세워 탈옥을 막고 평안도ㆍ함길도의 경우 정목을 심기 마땅치 않은 토질이라 가시나무 심게 하고, 서늘한 감옥과 따뜻한 감옥의 거리와 네 면 담장의 거리와 너비와 나비를 감옥 터의 형편에 따라 죄수들이 넘어가지 못하도록 짓자고 하네요. 그런데, 여기서 보이는 녹각(鹿角)은 사슴뿔이 아니어요. 사슴뿔처럼 생긴 일종의 목책이지요. 바로 이 자료를 통해 이 글의 제목이 나왔답니다^_^))

이어 세종은 죄수들의 복지와 관련하여, 특히 지방 감옥의 죄수들의 복지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린답니다.

 

여러 도 감사에게 유시하였다: 옥(獄)은 죄 있는 사람을 가두는 것이다. 그러나 덮어주고 보호하지 않으면 혹 횡액으로 병에 걸리어 일찍 죽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호(庇護)하는 조건이 ≪육전(六典)≫에 실려 있고, 또 여러 번 전지(傳旨)를 내리어 절목(節目)이 세밀하나, 관리가 혹 유의하지 않아서 받들어 실행함이 철저하지 못하여 죄수들로 하여금 질병에 걸리어 드디어 생명을 잃게 되니 참으로 염려된다. 경은 나의 지극한 뜻을 몸 받아서 해마다 반포하여 내린 조장(條章)을 받들어 실행하는지 않은지를 엄히 검사하고 핵실하여 폐지하고 해이하지 말게 하라. (아울러) 마땅히 실행할 조건을 또 뒤에 기록한다.

1. 매년 4월부터 8월까지는 새로 찬물을 길어다가 자주자주 옥 가운데에 바꾸어 놓을 것.

1. 5월에서 7월 10일까지는 한 차례 자원에 따라 몸을 씻게 할 것.

1. 매월 한 차례 자원에 따라 두발을 감게 할 것.

1. 10월부터 정월까지는 옥 안에 짚을 두텁게 깔 것.

1. 목욕할 때에는 관리와 옥졸이 직접 스스로 관리 감독하여 도망하는 것을 막을 것. ; 세종 30년(1448) 8월 25일

 

위에서도 밝혀졌지만, 당시 지방 감옥을 지키던 옥졸들 자체가 자신들의 직업에 자부심을 갖지 않은 터, 죄수들과 옥바라지 가족들을 지방관이 모르게 등쳐먹는 일이 비일비재한 모양이어요. 그러니 죄수들의 인명과 관련한 최소한의 복지라는 생활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래서 세종은 아예 죄수들의 복지와 관련한 내용을 조목조목 정리하여 명령을 내리고 있네요. 첫째, 여름철에는 감옥마다 찬물을 갈아 놓고, 둘째로 죄수들이 원하는 대로 목욕과 머리감기를 시키는데, 이 때 옥졸들로 하여금 철저히 관리하게 하여 도망하는 죄수가 없도록 하게 하며, 셋째, 겨울철에는 짚을 두텁게 깔아 냉기를 막도록 하고 있지요.

머리가 뛰어난 세종 임금이 당시 과학적 능력과 한계를 토대로 일구어 낸 감옥 보수를 비롯한 죄수들의 복지와 관련한 이러한 조치들은 인명을 중시해야만 하는 인군(人君)의 자세에서 비롯한 유교적 이데올로기의 발현이라고 생각해요. 아마도 인권(人權, human rights)이란 이러한 사고에서 출발하겠지요.




덧글

  • 긁적 2010/05/07 20:47 # 답글

    시대를 떠나 훌륭한 정치가는 비슷한 점이 있는듯 하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고리아이 2010/05/07 20:49 #

    데데한 글을 좋게 살펴주시니
    고마울 따름이어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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