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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거대 자본, 대학과 맞서는 청년들을 기리며 Modern Corean Clio

新羅의 敎育은 封建的 이데오로기로 倫理와 道德을 最高度로 强調하는 唐式 儒敎敎育이었었다. 이 이데오로기 밑에는 大衆的 敎育은 絶望인 것이다. 이러한 敎育은 시키면 시킬쑤록 도리어 大衆生活에는 損害가 큰 것이다. 그리하여 統一後 新羅의 文化의 向上은 남아 있는 藝術을 통하여 몹씨 禮讚을 받지만은 當時의 大衆生活은 極度로 不安中에 있게 되어 農民이 蜂起하고 大衆이 反旗 밑으로 모여 들게 되었던 것이다. 儒敎의 倫理道德의 힘이 窮乏과 抑壓을 反抗하는 힘 앞에는 一毫의 價値가 없게 되고 따라서 그것을 가르치던 敎育自體는 威信이 없어지고 말았다. 思想的 文化的으로 보면 新羅의 敎育은 新羅 自滅을 內包한 敎育이었었다. 이리하여 新羅는 鮑石亭 깊은 밤의 화려한 宴會를 마지막으로 하고 半月城 北宮에서 終幕을 닫았다(李萬珪 1947 ≪朝鮮敎育史(上)≫, 乙酉文化社, 94∼95쪽).

 

청년 하나가 거대 자본 대학과 맞서는 이 땅의 현실에서 어기적거리며 느즈막이 한자투성이의 글을 올리기에 생뚱맞을 수 있겠지만, 인내심을 가지시고 보아주셨으면 하는 바람이어요.

이 글은 해방 후 얼마 되지 않아 이 땅의 교육사를 정리한 이만규 선생의 ≪조선교육사≫ 안에 있는 한 구절이어요. 고려시대 교육을 이야기하면서 서술한 시대상인데, 1947년이라는 시대적 느낌을 그대로 전달해보고자 책에 있는 그대로 옮겨보았지요. 그럼 이제 이 글을 옮긴 노림수를 밝혀야겠네요.

바로 이만규 선생의 글을 몇 글자 바꾸어 2010년 오늘날로 옮겨보도록 할게요.

 

대한민국의 교육은 자본적 이데올로기로 자본주의의 윤리와 도덕을 최고도로 강조하는 서양식 프로테스탄티즘 교육이다. 이 이데올로기 밑에는 대중적 교육은 절망인 것이다. 이러한 교육은 시키면 시킬수록 도리어 대중생활에는 손해가 큰 것이다. 그리하여 해방 후 대한민국 문화의 향상은 세계 13위라는 고도성장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남아 있는 예술을 통하여 몹시 예찬을 받지만은 당시의 대중생활은 극도로 불안 중에 있게 되어 노동자 농민이 분노하고 대중이 반정부 시민주권행동으로 모여 들게 되었던 것이다. 자본주의 윤리도덕의 힘이 궁핍과 억압을 반항하는 힘 앞에는 일호의 가치가 없게 되고 따라서 그것을 가르치던 교육자체는 위신이 없어지고 만다. 사상적 문화적으로 보면 대한민국의 교육은 대한민국 자멸을 내포한 교육이다. 이리하여 대한민국은 청계광장 깊은 밤의 화려한 연회를 마지막으로 하고 광화문 광장에서 종막을 닫는다.

 

늦은 감이 있지만, 지난 3월 10일 김예슬님(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10100311102059&Section=03;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16048.html)을 비롯하여 홍명교님(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341192&CMPT_CD=P0001)과 심해린님(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345673), 채상원님(http://v.daum.net/link/6392370; http://blog.naver.com/selfstudy09?Redirect=Log&logNo=150083698584

: 아울러 오마이뉴스의 박솔희 기자님의 채상원님에 대한 이론 제기 글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356121)

에서 과 장승준님(시사저널에서 님의 글을 두 개나 있다고 해서 살펴보았는데, 전문은 보이지 않네요. 관련 기사 : 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51911), 여러 대학생들이 거대 자본=대학과 맞서는 용기있는 모습과 또한 거대 자본에 맞선 한 비정규직 노동자 김무준님(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347358), 그리고 김예슬님 자발적 자퇴를 지지하는 한 인하대학교 김진석 교수의 고백(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347825&CMPT_CD=P0001)을 기리며...

 

▲ 김예슬님이 펴낸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_뉴시스에서 얻음

▲ '김예슬 카페' 회원 '모두의리그'님이 올려놓은 중앙대학교 '진리의 상아탑'과 취업박람회 홍보물을 비교해 올린 그림_오마이뉴스에서 얻음


 

배암다리 :

요즘에도 대학생들을 만나면 자주 꺼내 쓰는 말이 있어요

20여 년 전 막 대학에 들어와 학과 전공과 관련하여 손에 쥔

주희의 사서집주 맨 앞 ≪대학≫ 첫 구절

큰 배움의 길은 밝은 덕을 밝힘에 있고, 인민과 친함에 있으니, 가없는 착함에 이름에 있으라.

[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

 

 




덧글

  • 고리아이 2010/05/15 09:52 # 답글

    2010년 3월 '김예슬 선언'을 보자마자 나는 "온 마음으로 지지한다"라는 글을 블로그에 올렸다. 지금도 지지하는 마음에는 전혀 변함이 없다. 하지만 이후 출간된 그녀의 책과 매체 인터뷰 등을 읽는 건 꽤 불편한 경험이었다. "래디컬"(radical)한 그녀의 사상이나 신념을 보고 나 자신을 성찰하게 되어 그랬던 건 아니다. 몇 가지 다른 이유가 있다.

    첫째, 그녀의 말과 글들이 주는 모종의 거부감 때문이다. 대개가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자의식을 지나치게 날것 그대로 노출시키는 텍스트였고, 분절된 짧은 호흡의 사유들이 권위적이고 딱딱한 어휘에 실려 쉼없이 내뱉어지고 있었다. 사실 그녀의 말과 글에 담긴 사상이나 감성들은 래디컬한 게 아니라 낭만적이라 해야 옳다. 급진주의가 '예외 없는 집단적 변혁을 위한 근본적이고 비타협적인 태도'라면, 낭만주의는 '예외적 개인들의 의지와 결단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태도'이다. 그래서 급진주의자는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의 정합성을 중요시하지만, 낭만주의자는 추구하는 가치의 진정성을 중요시한다. 역사적으로 낭만적 자의식이 뛰어난 예술을 낳은 경우는 많지만 사회 변혁을 만들어낸 경우는 거의 없다.

    김예슬의 글을 보자. "우리 사회의 진보는 충분히 래디컬하지 않다. 충분히 래디컬하지 못하기 때문에 쓸데없이 과격하고, 위험하게 실용주의적이고, 민망하게 투박하고, 어이없이 분열적이고, 놀랍도록 실적 경쟁에 매달린다." 이 주장에 반박할 수 있는 진보 인사가 있을까? 없다. 그 이유는 저 문장이 타당해서가 아니라 저 말에 별 의미값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옳은 얘기구나' 고개를 끄덕일밖에. 화려한 레토릭(수사)으로 비판을 대체하는, 전형적인 케이스다.

    내 불편함의 두 번째 이유는 '명문대생' 김예슬을 향한 일각의 냉소에 대한 그녀의 태도에 있다. "김예슬이 떠난 그 학교에 저는 가고 싶습니다" "저도 김예슬씨처럼 포기할 학벌이나 있었으면 좋겠네요" "삼류대생이 저런 선언 했으면 과연 어땠을지…" 등과 같은 반응이 20대를 중심으로 격렬하게 분출됐다. 이러한 냉소적 반응들은 그 자체로 한국 사회의 학벌주의와 대학 서열화라는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드러냄과 동시에, 김예슬 선언의 '어떤 이면'을 환기하는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그 냉소적 시선이 '김예슬 선언'의 실존적 울림과 사회적 중요성에 대한 유의미한 문제 제기라고 보기는 어렵다. 어쨌든 김예슬은 자신이 가진 거의 유일한 기득권을 포기했다. 누구에게나 기득권을 포기하는 일은 어렵다. '김예슬 선언'의 유물론적 보편성은 바로 거기에서 나온다.


    지지하는 만큼 치열하게 비판하고 토론해야


    그런데 김예슬은 명문대생 운운하는 반응에 대해 참으로 생뚱맞게도 "대학에 가지 못한 분께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전한다"라고 말한다. 뒤통수를 때리는 반전이었다. 나는 김예슬의 이 사죄를 사회운동가적 태도가 아니라 종교인적인 태도라고 생각한다. 중생의 죄를 대속하고, 타인의 죄도 내 탓이라 머리를 숙이는 종교인. 그렇다면 '투쟁'과 '연대'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건 '희생'과 '나눔'이 될 터이다.

    결국 우리들 중 누구도 '김예슬 선언'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정말 진지하게 생각했다면 그녀의 말과 글을 정면에서 비판하고 치열하게 토론했어야 했다. 하지만 진보 진영의 '선생님'들은 감탄과 찬사를 쏟아내기에 바빴고 또래들은 외계인이라도 본 양 신기해하거나 냉소했다. 김예슬은 자신이 사죄하지 않아도 될 일을 사죄하고, 정작 성찰해야 할 지점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김예슬 선언'은 누구나 언급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 텅 빈 기표가 되었다.

    박권일 ( < 88만원 세대 > 공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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